비가 와서 좋은 점.
비? 물비린내를 머금은 흙냄새에 취한다거나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 따라 마음마저 적셔지는 시절은 지났다. 신발 천 때기 틈 사이사이 스며드는 축축함은 미간만 좁혀질 뿐이다. 더 이상 우산 아래를 청음실 삼아 몇 시간이고 빗방울이 투덜대는 소리를 즐기지도 않는다. 건조해진 마음 덩어리들을 즐비하게 구시렁거렸지만 그럼에도 비 오는 날은 여전히 좋다.
내게 이 도시는 아직 황무지다. 시끄러운 하루를 마치고 오피스텔 어두운 복도를 걸어올 때면 18층의 커다란 건물 아니 천만 도시, 5천만의 나라, 80억의 지구에 내가 정녕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은 방금 전까지 난 휘황 찬란 VR 세상 속을 탐방하다 온 것이 아닐까. 닭장 마냥 현관 손잡이들만 지독히 균형스럽게 자리 잡혀 있다. 어둡고 적막하다. 복도의 변화라고는 그저 내 발에 맞춰 켜지는 주백색 센서등뿐이다. 통로를 가득 채운 무채색 콘크리트들은 나마저도 덩달아 딱딱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한차례 비가 쏟아진 날은 아니다.
좁은 복도를 두고 물방울을 잔뜩 머금은 우산들 덕에 복도는 버섯동산이 된다.
땡땡이, 세명은 거뜬히 쓸법한, 편의점에서 급하게 구매한 듯..
서로내 수저 숫자는 모르더라도, 행여 다른 이들에 보행에 방해가 될까 자기네 문 앞에 철저하게도 붙여놓은 우산들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 나 혼자는 아니구나 싶어 쓸쓸함이 가신다.
삐걱 일정도로 매끈하던 오피스텔 복도는 곳곳이 물자국이 자욱하다. 우산을 쥐고온 저 현관 안의 아무개들도 나도 오늘 하루를 적신 비를 머금고 돌아왔구나 싶다.
비는 매일 내리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이면 금세 꺼지는 오피스텔 복도 센서등 아래에서 우산을 하나 둘 세어보고는 집으로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