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빌이라고 세 글자가 크게 붙어있는 두 번째 집은 전세로 8천만 원이었고 빈 집이었다. 4.5평이라고 했나. 첫 번째 집보단 좁아졌지만 이전에 보고 다녔던 3평 4평보단 0.5평이라도 더 넓으니 낫다. 그리고 지상층이다. 1.5층이라고 하지만 1층에 가까웠다. 출입문 너머로 다섯 계단 위 돈을 불러온다는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진 타일이 크게 걸려있었다. 내가 보는 방은 복도 제일 끝 방이었다.
중개사는 K는 끝방이 가장 좋은 방인데 비어있다며 잘 안 오는 기회라 말했다.
으레 그 가격대 원룸이 그렇듯 신문지 한 장을 깔면 가득 찰만한 조그마한 신발을 놓을 장소가 있었고 곧 그곳이 주방이었다. 신발을 신고 인덕션 앞에 서야 하는 구조였다. 도마를 놓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싱크대는 내 한 뼘보다 조금 넓었다. 어릴 적 옆집 친구가 가지고 놀던 콩순이 주방요리 세트가 이곳보다 더 그럴듯했다. 입구에서 바로보이는 화장실은 환풍기 없이 내 얼굴만 한 창문이 나있었다. 주인 잃은 거미줄에 하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현관 주방 화장실이 사실상 일체형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운동신경이 둔한 J가 제자리멀리뛰기를 해도 화장실부터 주방 현관을 훌쩍 넘어 공용복도까지 나올 법 했다. 어디에나 있는 일체형 책상, 옷장, 내 명치 높이만 한 냉장고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중문 같은 건 없었지만 현관 안쪽으로도 공간이 있어 그곳에 침대를 놓는다면 다행히 현관에서 내 모든 집이 보이진 않겠다 싶었다.
그러면서 중개사 A는 아주 자랑스럽게 창문을 가리켰다. 창이 대각 방향으로 두 군데나 나 있었다. 서울의 고유한 풍토일지 모르지만. 내가 보아왔던 서울의 집들은 (물론 가격이 높다면 그런 일은 없겠지만) 창문을 열면 건넛집사람과 마음에 들지 않는 반찬을 바꿔먹을 만큼 가까운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 점을 중개사 K는 빼먹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어 보였는데 책상 앞을 열었더니 컨테이너 창고가 보였고 다른 쪽 창은 이삼백 평은 될 법한 공터였다.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것이 환기 걱정은 없겠다 싶었다.
… 여기는 뭔가요?
…아 여기는 창고예요. 주류창고 아하하하.
… 그렇구나
다시 한번 바깥 창을 열어젖히고, 밖을 쳐다봤다. 말 그대로 주류창고가 맞나 보다 저기 끝에
짙은 초록 술짝이 네 개가 나란히 쌓여있다.
지하철도 가깝다. 처음 봤던 집보단 J의 집이 멀어지긴 했지만 충분한 도보의 거리다.
창밖은 주류 창고라고 하지만 코로나의 여파인지 휑하니 비어져있었다. 훤히 창문을 열어놔도 괜찮겠다 싶다.
… 할게요. 여기. 대출되고 8천만 원 맞았죠?
… 그럼요.
곧장 집주인에게 전화를 건 중개사 K의 통화내역은 잘 들리지 않았는데 힐끔 내쪽을 보는 것을 보니 생각처럼 되지 않는가 보다.
… 할아버지~ 여기 팔천이라 그래서 멀리 서 온 손님이랑 왔는데 왜 갑자기 그래요~
… (안돼 안돼… 너무 싸게.. 너무..)
집주인이 너무 싸게 내놨던 것 같다며 천만 원을 돌려받길 원했지만 더 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
결국 반전세로 하자며 관리비 10만 원을 더 돌려받길 원해 결렬이 되었으나 중개인의 세 번의 통화 끝에
5만 원의 관리비를 더 받기로 결정이 되었다.
… 여기 할아버지가 돈 욕심이 좀 아주 쪼금 많으세요.
중개인 K는 엄지와 검지를 세워 약간의 여백을 두고 조금을 강조했다. 가계약금을 보냈다.
이삿날은 머지않았고,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럼 이제 나가볼까요라는 중개인 K에게 5분만 더 둘러보겠다 말했다.
… 그럼요~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4.5평의 방이지만 J도 그동안 봐왔던 집보단 마음에 들었는지 이 정도면 잘 구했다며 기뻐했다.
구조가 어떻게 돼있는지 모르겠지만 J의 말이 방을 통통 튀어 다니며 미세하게 울려 퍼졌다.
큰일이 없는 한 이제 2년 동안 내가 살 집이 되겠지. 한쪽 벽에는 프랑스의 카페거리를 찍은 듯한 몹시 화려한 도배지가 있고, 드문드문 벽지가 찢어져 있었다. 누런 떼가 묻어있기도 했다. 냉장고, 에어컨 전원이 꽂힌 콘센트 커버 쪽은 몇 번의 도배로 두껍게 굳은 벽지가 습기를 머금었는지 쩍쩍 갈라 져 회색빛의 콘크리트가 훤히 보인다.
그렇지 이게 서울의 빛깔이야. 잿빛의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