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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Oct 03. 2024

상식을 넘어서

창조력의 가장 큰 적은 상식이다.

  - 피카소


파카소의 이 말은 기계에게 불리해 보인다. 현재까지의 기계는 예측가능한 상식적인 로직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계에게 여러 불규칙한 카오스적인 상황에 대한 메타인지 기능을 부여하고 인간처럼 실수를 예술로 만드는 능력 또한 장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터너 이전에는 영국에 안개가 없었다는 말처럼 우리는 관점을 변화시키면서 또는 예기치 않은 실수나 우연으로 또 다른 신천지에 발을 디딘 경우가 많았다. 페니실린의 발명은 우연이었고 포스트잇이나 여러 발명품은 실수나 실패에서 찾아낸 것이다.


에디슨 자신의 무수한 실패를 실패로 단정하지 않고 성공하지 않은 다른 방법을 알아낸 과정이라고 보았다.

인류가 걸어가는 궁극의 여정은 편리함의 극한만은 아닐 것이다. 소외되는 사람을 되도록 작게 하고 보편적으로 복지를 누리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온당할 것이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더 낫게 실패하라.

     - 샤무엘 베케트


인체를 마루타 실험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동물실험이나 다양한 시뮬레이션으로 인간의 뇌를 구현하려고 노력하듯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기에 우리는 인공지능 괴물보다는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기계를 원한다. 그렇지만 인간을 넘어선 초지능의 존재나 예술하는 기계는 언젠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기계가 결코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 여겨지는 인간 활동 영역이 창조력이다. 우리는 상상하고 혁신하는 능력, 인간 존재의 의미를 높이고 바꾸는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

우리는 창조력이 인간다움에 의존하는 코드라고 믿는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진혼곡을 들으면 우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오셀로> 공연을 보면서 사랑과 질투라는 우리 감정 세계를 탐색할 기회를 얻는다.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는 모델의 외모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어떻게 기계가 모차르트, 셰익스피어, 렘브란트를 대신하거나 그들에게 필적할 수 있겠는가?

   - <창조력 코드>,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박유진 옮김, 북라이프, p.15


수학자 사토이가 이 책을 쓴 시점이 2020년이니까 생성형 AI가 폭발적으로 여러 가지 추출물을 생성해 내기 시작하기 이전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마커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인류의 미래에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창조성이라는 영역 또한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 시점, 즉 특이점이 언젠가 올 수 있다면 인간은 기계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체될 수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AI가 쓴 글이나 AI가 그린 회화작품, 또 AI가 작곡한 음악은 이제 버젓이 인간 세상에서 활개치고 언뜻 구분하

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진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계가 추출해 낸 작품들은 인류의 유산이라는 빅데이터에 의존해 인간을 흉내 낸 산출물이지 엄밀한 의미의 창작물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여기에도 반론의 여지는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선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무리 독자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은연중에 과거의 유산에 기대어 생각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창작 메커니즘도 기계적인 질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 방식은 언어에 기반한 유추이고 기존의 창작물에서 발견한 이미지를 다른 각도로 형상화하는 경우가 많다. 작곡가가 악상을 떠올리는 경우도 오선지에 기반하고 있는 음악적인 문법이나 음계 체계에서 완전히 이탈하기는 힘들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을 내놓을 수 있는 것도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 하이든 같은 선대 작곡가, 거기에 클래식을 향유하고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귀족과 유럽사회의 문화적 배경들이 상호작용했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자 스티븐 슬로먼의 말을 인용해 본다.


기본적으로 지능은 개인의 지적 능력에 대한 측정치이고 지능의 측정치는 사람들이 각자 가진 엔진의 크기로 평가하는 수단이다. 지식이 공동체에 있다고 보면 지능을 다른 식으로 이해할 방법이 생긴다. 지능을 개인의 자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기여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 <지식의 착각>, 스티븐 슬로먼, 필립 패튼백 지음, 윤희경 옮김, p.267=268


그래도 많은 예술가들은 정서적 위안 또는 새로운 충격을 위해 자신만의 방에서 더 높은 경지를 위해 씨름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가 있어서 우리는 기계와 구별되는 인간성의 구현과 고차원적인 심미안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등불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더 나은 방식의 실패와 상식 너머의 존재를 찾아가는 일, 그것은 예술가만이 아닌 기계에게 맡길 수 없는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 파울 클레




Itzhak Perlman - Introduction & Rondo Capriccioso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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