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 가끔 어떤 분야의 큰 별을 만나면 바짓가랑이가 찢어지도록 달려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제법 내공이 쌓였다고 우쭐한 마음이 들었을 때는 책을 보며 “이 정도라면 나도 책 한 권 쓸 수 있겠어”하는 마음도 들었다.
내 마음에 들어온 클래식 선율들을 접할 때면 이건 대체 어떤 천재가 쓴 곡일까? 감탄에 젖을 때가 있었다. 실상 그런 곡들을 남긴 천재들은 무수히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회의의 시선을 보내는 웅성거림을 견딘 경우가 많았다.
베토벤이 <템페스트>로 알려진 곡을 쓸 때는 청각 이상에 따른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는 비참한 시기였다. 베토벤은 의사의 권유로 하일리겐슈타트에 요양차 가서 자살을 암시하는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 삶을 포기하진 않았다.
예술가들은 완벽한 평온의 상태에서 최고의 작품을 내놓기보다 때로는 자신 또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런 마음의 상태를 표현해서 공감을 얻는 경우가 많다.
고흐와 뭉크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개인사와 가족사가 꼬여서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시기에 명작을 쏟아냈다. 뭉크의 <절규>는 결혼 실패와 가족들의 자살이나 다양한 불운이 연달아 발생한 시기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는 작가가 가장 고통스럽게 머리를 쥐어뜯는 아픔을 호소하는 작품이었다.
<절규>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로 사랑받는 건 우리는 극한의 불행 속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고 공감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불명예를 가진 한국에 쇼펜하우어 열풍이 분 것은 어쩌면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철학자의 말이 먹혔기 때문일 것이다. 극심한 경쟁이 우리를 압도하더라도 쇼펜하우어의 말들을 새기는 이들이 많다는 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건강성의 징표가 아닐까 해서 반갑기도 하다. 그러기에 불편한 세계 1위 자리도 곧 내려올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도 보인다.
미국 MIT 철학과 키어런 세티야 교수도 만성 통증을 수십 년째 안고 살면서 인생의 고통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사는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 누구도 인생에서 외로움, 질병, 상실...... 같은 고난을 피할 수만은 없기에 어떻게 받아들이고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세티야 교수는 "우리가 삶에 엄청나게 많은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수록 삶이 아주 작고 다양한 성공과 실패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라고 한다.
- <라이프 이즈 하드> 키어런 세티야 지음, 연아람 옮김, 민음사, p.184
멕시코 쪽 미국 국경에는 여러 나라를 거쳐 탈법과 불법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온 가족이 봇짐을 들고 어린아이를 둘쳐업고 기회의 땅을 노크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내 생의 작은 짐은 어쩌면 생사를 넘나들며 우주의 무게를 짊어진 듯한 고통에 짓눌린 이들에 비하면 작은 생채기 수준이 아닐까.
백건우 Kunwoo Paik - Beethoven : Piano Sonata No.17, 'The Tempest' : III. Allegret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