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멈추고 보이는 것들
일을 그만 두고 아이와 함께하는 백수의 삶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간혹있네요. 좋은 것 혹은 달라진 것이 무언지 여쭤보길래 생각 정리를 좀 해보았습니다.
첫번째로 간략히 표현하자면
‘아이의 삶에 달력이 아닌 시계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많은 분들이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에 선물을 선사하는 산타클로즈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달력에 동그라미 그려두는 그런 날에만 존재하는...
저 역시 아버지는 어쩌다 한번 제 삶에 등장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어쩌면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저 역시 그런 아버지로 살아가며, 난 아이와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는 가장이라며 외로움과 쓸쓸함에 대해 자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의 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바닥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몰래 주워먹고 눈웃음 짖는 모습
- 배경음악으로 틀어 둔 음악에 문득문득 흔들흔들 춤을 추는 모습
- 사촌 언니들을 만나고 온 다음 날의 부쩍 큰 듯한 모습
- 빠빠 소리가 아빠아빠 소리로 변해가는 것
일에 잠겨 바삐 살던 삶에서는 이런 모습은 전해듣거나 어쩌다 운 좋으면 마주치게 되는 연중 이벤트였을 테지요.. 그러나 지금의 저는 날짜와 요일에 대해 오히려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몇월 몇일인지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흘러갑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외출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다보니 더 지금, 오늘 하루에 집중 할 수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다보니 아이와 함께 보내는 매일은 시침이나 분침 아니 때로는 초침 단위로 아이의 삶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경이로운 삶의 궤적을 나란히 하고 있자면 이 얼마나 축복인가 하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백수가 되어 만끽하는 변화 혹은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두번째로는 별다른 일정이 없는 일상을 보내며, 변화된 것은 이메일 확인을 거의 안합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확인하던 이메일을 이제는 하루에 한두번, 때로는 며칠에 한번 확인합니다. 가끔 들어가도 답메일을 보낼 메일이 없는 사실을 발견하면 내가 지금 일을 멈추고 있구나를 확신하게 됩니다. 어쩌다 안부를 묻는 메일이 오거나 구독하던 뉴스레터에서 관심있는 글이 보이면 반갑게 느껴집니다. 일에 파묻혀 수십통의 이메일을 읽고 답하고 하던 때에는 생각도 못하던 감사합니다.
세번째로는 미루어두었던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박사과정을 수료한지 10년이 지나 학위논문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때는 빨리 학위를 마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 중 하나였는데, 십 년의 시간이 흐르다보니 학위를 마치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워크워크워크의 삶속에 잊고 있었던 것 중 하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