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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도 Sep 28. 2021

백수일기-3

가사노동

아침 먹은 설거지를 마치고 진공청소기를 꺼내어 들면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던 그 일을 멈추고 자기만의 청소를 시작한다.

매트를 접는 타이밍에 맞춰 접혀있는 매트 위에 올라오고
침대 밑을 청소하면 자기도 엎드려 침대 아래를 보고 
한참을 무어라 하며 걸레질을 한다.

아이의 청소는 나의 청소와는 분명 다르다.
나의 청소는 가족의 건강과 청결이라는 미명 하에 혼자 산다 면 매일 할 필요 없는 
다소 번거로운 가사노동으로 자리 잡았다면 
아이의 청소는 그냥 놀이 그 자체이다.

소꿉이 ‘아이들이 살림살이를 흉내 내는 짓’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아이의 청소는 소꿉놀이이고 나의 청소는 가사노동이다.

사실 아내와 나는 청결에 대한 기준이 사뭇 다르다.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그래서 아이가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는 청소와 설거지, 빨래 등 

모든 가사노동의 기준과 방식을 두고 만만찮은 설전이 오갔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혼나고 반항하고 삐치는 것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 
늘 청소와 빨래, 설거지 등등은 가사노동이었지
둘만의 소꿉놀이였던 적이 없었다.

아이와 함께 청소하며 나의 가사노동도 순간순간 소꿉놀이가 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내가 이 글을 보면 어이없어하겠지만 아이와 함께 가사노동과 소꿉놀이의 경계를 경험하며 

나의 과거를 반성한다. 

아내와 함께하는 가사노동도 소꿉놀이가 될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하지 못했었는지...


사실 가사 노동은 안 하면 티가 팍 나고 해도 티가 별로 안 난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있지만 루틴 속에도 끊임없는 변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가사 노동은 생활방식과 문화 등에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노동이다. 

예컨대, 아침을 차리고 먹고 난 후 청소를 하며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따라 집 인테리어나 청소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특히 아이와 함께 하는 식사라면 더욱더~)


아침을 빵과 과일로 먹으면 진공청소기로 휘~잉하고 청소를 하면 되고

아침을 밥과 국으로 먹으면 걸레질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카펫 생활을 하는 서양식 생활방식을 좋아했는데 

형형색색의 반찬과 국물을 주로 먹는 우리에게 

카펫은 흘린 음식물을 청소하기에 무지하게 힘들고 곤욕스러운 것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이토록 가사노동은 매우 집약적 노동이며 문화적 민감성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한다. 

여기에 젠더 감수성까지 갖추지 못하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적고 나니 이젠 백수라기보다는 가사노동자의 태가 약간 나는 듯도 하다. 

진정한 가사노동자가 되기는 아직도 멀었지만..

아무튼 집 밖 일을 멈추고 집안일에 관심을 두게 되니 

왜 가사 ‘노동’이라 부르는지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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