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t therapist Dec 15. 2023

나에게 있는 유전병

"엄마 학교  오리엔테이션에 참가비가 있어야 한데요. 50불이래요."


대학교 편입을 준비하는 큰 아이가 참가비가 필요하다는 말에 "무슨 오리엔테이션에 참가비를 따로 내?" 의아함과 동시에 요즘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 용돈이 한참 부족한 큰아이가 자동으로  의심스러워졌다. 참가비 내라는 알림이나 공지서가 쓰여있는 걸 보여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서 이런 걸로 부모의 돈을 삥땅을 치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남편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 알았어. 바로 보내줄게" 라며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남편은 "00는 학교일로 거짓말하지 않아,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돈이 없으면 없다고 말하면 되지? 그리고 뭐 부모한테 삥땅 좀 치면 어때? 겨우 50불인데."라는 말에 나는 또 깨달았다. "아.. 이 정도면 나는 정말 병이구나."


유전병은 사실 유전자의 문제로 인한 병이라서 가족 안에서 대물림되기 쉽다. 나에게도 유전병이 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병. 나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사람을 믿지 못하셨다. 늘 누구든 의심하고 경계하셨다. 때론 이런 의심의 눈초리는 사회생활에선 오히려 득이 될 때도 있었지만 가족관계를 병들게 만드는 시초가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혹여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길까 , 혹은 다른 사람에게 피 같은 당신의 돈을 갖다받칠까 눈에 불을 켜고 살피셨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어머니의 위치를 확인했고 은행에서 모르는 돈이 혹여 빠져나가면 득달같이 물으셨다. 그럼 어머니가 아버지의 의심을 살만한 행동이나 여지가 있었냐라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다. 정말 어머니는 순진하리만큼 가족과 아이들밖에 모르신 분이었다. 그 당시 친구도 없고 계모임도 없이 늘 일과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셨다. 그렇게 오십 년 가까이 살아오신 어머니를 여전히 지금도 의심과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가 때론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자식들인 우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우리의 미성숙함이나 실수는 늘 부모를 배신한 패륜아가 되곤 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늘 당신의 뒤통수를 후려칠 자식으로 여기시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아버지의 뒤통수를 칠 자식이 되진 않았지만 우린 한없이 멀어졌다.



그렇게 부모에게 신뢰와 신임을 받고 자라지 못한 나 또한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도 나를 믿지 않으니 나도 부모님을 믿지 못했다.  부모님은 언제라도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세상 천치에 가족끼리도 신뢰가 없으니 세상사람을 믿을 리가 없었다. 사람을 불신하는 병은 일에서나 사회에선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때가 많았다. 사람을 믿지 않으니 성급한 약속이나 헌신을 하지 않았다. 늘 조심해서 사람을 사귀고 가려 만나다 보니 이상한 사기꾼들에게 엮일 일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사람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실망감이나 상처도  거의  받지 않았다. 원래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오히려 무턱대고 사람 좋아하고, 덥석덥석 아무나 믿어 버리는 그런 유형의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스스로 생각한 적도 많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전까지는.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에선 신뢰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는 나는  남편도 아이들도 온전히 믿어 줄 수가 없었다.  너무 믿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의심이 들고 불신이 먼저 생겼다. 그로 인해 사소한 갈등이 큰 싸움이 될 때가 많았다. 그건 남편이나 아이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나의 불신의 병으로 인한 것이 훨씬 컸다. 그래서 사십이 넘어도 이런 불신의 병을 나에게 대물림한 부모가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다. 아이들을 믿어주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무척 괴롭게 하고 힘들게 했다.

 

불신이 친밀한 사이를 만들어가고 유지해 가는 데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후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살면서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친밀해질 수 없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가장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이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래서 나는 이 유전병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유전병을 물려주지 않을 방법은 내가 온전히 아이들에게 신뢰와 믿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이 안전하고 믿을만한 사람일 때만 가능하다. 그러려면 내 불신의 병이  다 나아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병이 쉽게 치료될 리가 없었다.  이 병은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믿을 만하고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경험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너무 경계하기에 그런 깊은 관계를 맺어가고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신뢰를 쌓을 기회조자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나는 아이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 나 또한 부모에게 사소한 거짓말을 하면서 컸음에도 아이들의 거짓말에 발각될 때마다 쉽게 분노했다. 부모님이 나에게 그러 했듯이. 아이들은 충동적이어서 거짓말을 쉽게 한다. 그건 그들이 나쁜 아이가 아니라 아직 자신의 본능을 다스릴 줄 모르는 미성숙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꾸준히 거짓말은 개인에게도 관계에도 좋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이론적으론 너무나 잘 알아도 아이들이 하는 사소한 거짓말이 쌓일 때마다 나의 불신의 벽이 점점 높아지고 아이들을 향한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가 강해졌다. 그리고 세상  가장 나쁜 짓을 저지른 아이들처럼 아이들을 혼냈다. 그리고 아이들이 엄마의 눈빛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도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부모님의 눈빛과 태도를 보일 때마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어떨 땐  이 사람에 대한 불신은 거스를 수 없는 내 인생의 족쇄처럼 느껴지지도 했다.


아마도 나는 평생 이 병을 완벽히 고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보다는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칼같이 잘라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릴 인연도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향한 의심과 불신이 솟구칠 때마다 진실을 다그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일단은 참는다.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고 싶다가도 "이건 내 문제야"라며 시선을 돌린다. 이런 작은 결단과 행동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이 이 병을 고치는 방법이자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병을 고칠 때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이 내가 병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나도 내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성인이 되었다. 그래서 개선할 방법이나. 노력 따위를 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것이 병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내 행동과 태도는 달라졌다.  비록 우리가 당뇨병을 단번에 완치할 수는 없지만 운동과 식단으로 조절하면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내 마음의 병도 그렇게 다스리며 살아가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건 사랑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