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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Sep 07. 2023

그건 사랑이었다

나는 요리하는 걸 별로 겁내지 않는다. 덕분에 결혼을 하고 유난히 까다로운 남편의 식성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게 되었고 30-40인분의 단체 식사도 가능하다. 단체 음식은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한 15년 넘게 식사 봉사를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들 생일상도 손님접대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다. 이런 나를 보면서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하냐며 묻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게.. 어쩌다 나는 이렇게 되었나?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원래 나를 위해선 음식을 잘하진 않는다. 혼자  있으면 에너지 바나 미숫가루 한잔으로 허기를 때우는 편이다. 남편처럼 먹는 것도 그렇게 즐기는 미식가도 아니다. 그런 내가 왜 이렇게 요리에 겁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나의 첫 기억이 엄마와 함께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사러 다니던 기억이 났다.


그랬다.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하시고 자주 하셨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먼 친척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매일 10인분 정도의 식사를 차리셨다. 거기다 웬일인지 ( 아직도 의문이다.) 우리 집은 매달 제사가 있었다. 추석과 설날이 겹칠 때는 한 달에 두 번을 차리기도 하섰다. 제사음식.. 전이고 나물이고 생선이고 가끔 먹으면 별식이 되겠지만은  한 달에 한 번씩  거의 똑같은 음식을 똑같은 방식대로 만들어야 하는 음식은 그야말로 중노동이다.  그리고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정말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많다.


거기다 주말에 할머니 쪽 식구들이 자주 놀러 오시곤 했다. 그때는 또 손님상을 차리시곤 했다. 친가 쪽 삼촌에, 큰 아버지 조카식구들 까지 오시면 20명이 훌쩍 넘기곤 했다. 그 음식을 엄마는 다 하셨다. 당연히 시장을 자주 가시고 음식 손질을 많이 하셨다.


내가 엄마와 가장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함께 시장을 따라가고 엄마 옆에서 전도 부치고, 콩나물도 다듬고, 시금치도 다듬던 기억이다. 유일하게 딸이기도 했고 엄마를 도와드리고 싶은 갸륵한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크고 나서  시장 보는 것이 훤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요리도 친근해진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요리가  친근하다고 해서  쉬울 리가.  얼마 전에도 시어머니 팔순생신에  예배를 마치고 교회분들에게 식사 대접을 했다. 고작 30-4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라 함께 시어머니 생신을 축하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 양에 맞는 미역국도 끓이고, 불고기, 산적, 녹두전, 나물 등등을 준비했다. 며칠을 장을 보고 준비해야 했고 하루종일 서서 음식을 만들었다.


그때 나는 엄마생각이 참 많이 했다.' 나도 어쩌다 보니 엄마처럼 살고 있구나.'라며.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남편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주변으로 부터  칭찬도 들으면서 한다.  특별히 남편은 요리준비하고 설거지랑 정리정돈은 항상 그의 몫이다. 그 덕분에 요리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데 우리 엄마는 그때 그 마음으로 이 힘든 일을 어찌 혼자 했을까 싶었다.


아무리 잘해도 아들뿐이 시어머니와  아내를 도와주는 건 팔불출이라 생각하던 아빠와 살면서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으로 가출할 짐을 쌓다 풀었다 했던 엄마였다. 그런 마음으로 매일 7-10인분의 밥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셨다. 아빠랑 사네 안 사네 싸우셔도 또 제사음식을 하러 시장을 보러 가셨다. 물론 아빠랑 심하게 싸우신 날엔 물만밥에 김치나 마른 멸치가 반찬이 나오기도 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이건 너무 심해"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하다. ( 나도 남편이랑 싸운 날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시어머니는 나를 무작정 미워하고 사사건건 간섭이다. 남편은 그런 시어머니에 착한 아들일 뿐이다. 내가 힘들다는 말도 아프다는 말도 다 귓등으로 여기는 남편과 살아야 했다면 나는 제사상은커녕 밥도 차려주기 싫었을 것 같다. 매달 찾아오는 제사고 주말마다 찾아오는 시댁 식구들도 꼴도 보기 싫었을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엄마는 늘 요리를 하셨다. 그건 어차피 당신에겐 자식을 버리고 모질게 떠날 수 있는 독한 여자가 못된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감사해 주지도 않는 그 요리하는 시간을 오빠와 나 때문에 버티신 것이다.  분명 그건 사랑이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런 집에서 그렇게 헌신하고 못 살았것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 때문에라도 참을 수 있었을까? 글쎄다.


엄마는 어린 시절 한 번도 나를 향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신 적은 없었다. ( 다행히 지금은 잘하신다.)그래서 그것이 내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했다.  엄마는 진짜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싶어서. 하지만 이제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어보니 그 시간을 버티시고 견디신 것이 사랑이었다는 걸 너무 잘 알겠다. 정말 아무나 못하신 걸 해내신 것이다. 그때 그 착하고 예쁘던 엄마를 꼭 안아주고 싶다. 그 시간을 견뎌줘서 너무 고맙다고.




정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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