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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정미 Nov 13. 2024

부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물들어 가는 것

심리 상담가로서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배우자는 바뀌지 않으니 바꾸려고 하지 마라. 이런 나의 말에 무슨 부부사이에 대단한 비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던 사람들은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전히 바뀌지 않는 배우자와 한 공간에서 살길이 막막하고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비슷한 성향과 취향의 배우자를 선호하기도 하고 나의 성향을 따라와 줄 '무취향'인 배우자가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연애를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 대해 완벽히 알 수가 없다. 아니 인간이란 존재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 완벽하지 못하다. 그래서 연애를 하는 동안엔 주로 상대에게 나의 좋은 면 혹은 상대가 원하는 모습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심지어 동거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결혼이라는 책임으로 묶이고 서로에게 다른 옵션이 없다고 느낄 때 각자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더 나아가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부부가 세상 그 어떤 관계 중에서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장 본능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결혼의 시작은  빙산의 일부만 보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아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잠겨있는지는 나 자신도 배우자도 모른다. 때문에 결혼생활이 어려운 것이다.


부부관계의 놀라운 비밀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만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에게 물든다는 것이다. 옛날 어른들은 닮아간다고 했다. 외모뿐만 아니라 식성, 가치관, 생활습관, 말투 등등이다. 부부는 어찌 보면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들어 가는 것이든 닮아가는 것은 둘이 완전히 똑같은 모습, 똑같은 생각,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고유한 자신의 기질이나 성격은 가지고 있지만 배우자의 다른 점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다름을 배려한다는 말이다. 나아가 배우자의 장점은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신체건강한 한국인이라는 사실만 빼고 거의 모든 것이 반대이다. 나는 에너지가 낮고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 극내향형이지만 남편은 에너지가 높은 외향형 인간이다. 나는 쓸데없이 진중하고 남편은 지나치게 짓궂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고 남편은 더위를 많이 탄다. 나는 안정지향주의자이고 남편은 도전주의자이다. 나는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편이라 디테일이 떨어지고, 남편은 디테일은 강하지만 주로 딴 길로 새기일 수이다. 나는 가방에 지갑과 자동차 키만 가지고 다닌다면 남편은 없는 것이 없는 만물상 가방이다. 나는 정리정돈 보다 쉬는 것이 먼저이고, 남편은 정리정돈을 해야 쉴 수 있는 사람이다. 남편은 물건을 살 때 기능이 가장 중요하고 나는 디자인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고슬밥을 좋아하고 남편은 진밥을 좋아한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 가지 우리는 안 맞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다름으로 인해 싸우지 않는다. 서로의 취향이나 기질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고 서로의 그 다름으로 인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인정을 하기까지 잦은 다툼과 갈등 그리고  깊은 대화와 화해의 시간이 필요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다름은 존중하고 배려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서로의 고유함을 헤치지 않으려다 보니 오히려 닮게 되었다.


내가 밥을 하면 남편을 위해 진밥을 하고 남편이 밥을 하면 늘 고슬밥이 된다.

남편이 우울할 땐 나는 그와 함께 외출을 하고 드라이브를 하고, 내가 힘들 땐 남편은 늘 나를 집에 혼자 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한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 차에 늘 외투와 담요를 챙겨 다니고 여름엔 더위를 많이 타는 남편 때문에 에어컨을 틀고 나는 이불을 덮고 잔다.

물건을 사기 전 남편은 나에게 디자인을 물어봐 주고 나는 늘 남편에게 기능이 괜찮은지 물어본다.

여행을 가기 전 나를 위해 남편은 동선과 안전을 한번 더 확인하는 편이고, 나는 남편을 위해 가보지 않은 곳, 해보지 않은 것도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안정적인 나 때문에 경제적 자립도 안정적 육아도 가능했다. 도전적인 남편 덕분에 나는 혼자라면 할 수 없었던 대학원 진학이나 출판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감정적으로 쉽게 흥분하고 쉽게 결정하는 남편을 늘 워워시키고 남편은 늘 안주하고 가만히 있으려는 나를 붙돋아 새로운 도전하게 한다.

진중한 나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장난끼 많고 재미있는 남편은 그 길이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틈을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른 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물들었다. 각자의 고유함에 상대방의 색깔이 조금씩 스며든 것이다. 여전히 우린 많이 다르지만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 나와 기질과 성향이 비슷한 사람과 함께 산다고 행복할까? 아마 싸움은 덜할지 모르지만 지루한 삶이 확률이 높다. 아니면 나의 성향과 기질을 모두 받아주는 '무취향'인 사람을 찾아야 할까? 아마도 그/그녀는 10년 후에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걸릴지도 모른다. 세상에 기질이나 성향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예민하고 감정적인 사람만 있을 뿐. 상대에게 100% 맞춰주는 사람은 마음이 병들 게 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과 서로에 대한 신뢰만 있다면 우린 얼마든지 서로에게 물들어 갈 수 있다. 마치 옷에 물을 들일 때 실로 너무 꽁꽁 묶어 놓지만 않으면 자연스럽게 옷에 물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옳아! 당신은 틀렸어. 내 선택이 최선이야. 너는 이상해'라는 마음이 상대에게 물들지 못하게 막는 꽁꽁 묶어놓은 실과 같다.  상대에 대한 마음의 실만 조금만 느슨하게 풀 수 있다면, 배우자를 틀림이 아닌 다름이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배우자의 다름이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다채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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