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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ㅡ 무게없는 계절 그리기

계절이 바뀌는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바람이 아니다 투명한 유리판처럼 공기와 공기 사이에 얇게 끼워지는 접착제가 없는 표류의 결이다


나는 그 무게 없는 결을 손바닥으로 밀어보며

균열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더듬는다


흰빛이라는 단어조차 이 계절을 담아내기엔 부족하다 이 시간은 색을 제거한 뒤에도 남아 있는 잔광의 층위


덜 말라 굳은 석고의 내부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차가운 수증기 같은 질감이다

나는 그 질감 속을 걷는다 걷는 다기보다는

스며들고, 흡수되고 형체를 바꾸며 이동하는 것에 가깝다


몸은 하나의 캔버스가 되어 표면과 내부의 경계를 잃어버린 채 이 계절의 입자들을 받아들인다


드러나는 곳마다 얼음이 아니라 소리를 잃은 파동들이 얹힌다


마치 온 세상이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다

어딘 가에서 오류가 난 화면처럼, 선명하지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정지된 떨림이 피부에 작은 지층을 쌓는다


나는 그 떨림을 지운 채 지나가지 않고 그 떨림이 나를 다시 그리도록 허락한다



한 점 한 선이 아니라

형태의 경계가 아득히 흐려지는 추상회화처럼

나라는 도형은 이 계절 위에 다시 배치된다


이 무늬는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존재가 남기는 흔적이다


어떤 밀어냄도, 어떤 막아 냄도 없이

몸 전체가 하나의 큰 채색막처럼 계절의 입자를 흡수해 아무도 모르는 내부의 색조를 변화시키는 일


이 질감의 계절은 파괴가 아니라 변용이다 둔탁한 흰색의 층 속에서 아주 느린 온도의 숨결들이 새로운 형태의 여백을 만든다

나는 그 여백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곳에서는 무엇도 얼지 않고, 무엇도 완전히 녹지 않는다 다만 한 존재의 가장 깊은 결만이 보이지 않는 색으로 계속해서 자신을 다시 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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