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하 Sep 27. 2021

여러가지 생각들

8월에 한 생각


"이제 좀 그만해"

라는 말의 어감은 참 나를 소름끼치게 한다. 

지금까지 참아줬고 봐줬으니 이제 내 눈에 짜증나는 짓을 그만하라는 말같다. 너도 나와 똑같은 수준의 사람일 뿐인데 다른 척 그만해라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나는 이런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여자들을 사랑한다. 


이런 여자들은 미디어에 속지 않는다. 대중의 의견에 흔들리지도 않고 오직 자기 내면의 소리에만 집중한다. 자기 고집이 있고 신념이 있기 때문에 아닌 것들에는 끊임없이 의문을 가진다.


내가 만난 한 고집있는 여자가 있는데 나의 엄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나와 가족을 위해 일하고 같이하는 사람인데 24시간이 바쁜 와중에도 나는 엄마의 고집을 본다. 엄마는 내 모든 말에 귀기울이지만 결국 한 마디도 듣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자아와 그 심연에는 닿지 못할 우주가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어릴 때 엄마에게 외계인이냐고 자주 물어봤다. 마치 등에 숨겨둔 지퍼를 내리면 외계 생명체가 있을 것만 같은 독자적인 사람이고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내향적인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손에 자란 나도 모든 선생님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고집있게 살아올 수 있었다. 


 미디어에서는 평생을 자신을 잃고 가족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란 존재에 대해 가여워한다. (나는 미디어에서 존경의 의미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의 행위에 대해 '고마워'한다. (그 고마움 또한 사랑은 없는 듯 싶다) 하지만 나는 한순간도 엄마가 가여운 적이 없었다. 그는 능력있는 사람이고, 똑똑하고 무엇보다 낭만적인 고집이 있다. 그의 신중한 선택들이 지금 그의 삶을 만들었기에 "나는 엄마처럼은 안 살거야"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왔고 한 생명을 양육했기에 나라는 존재가 결과물로서 나타났다. 나는 앞으로도 그가 그의 인생으로 보여준 고집들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해내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이 관계 속에서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표현되는 한국식 효의 감정을 느끼진 못한다. 그는 나를 기를 것을 선택했고 그의 고집대로 살아온 것을 존경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엄마는 항상 말했다. 어쩌면 너무 잔인하리만치 현실적인 진실을 나에게 항상 말해줬기에 그의 삶을 동정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엄마의 이익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저씨 그만 좋아하기


나를 둘러싼 사회는 워낙 좁아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폭도 굉장히 좁았고 그 중 90%는 여성이었다. 그런 내게 고질병이 있었는데 나이 많은 남자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속한 미술과 관련된 사회 안에서 중년 남자들은 상당히 과분한 일을 맡고 있었고 물론 비난도 받았지만 그 비난이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 않았다. 또 그에 비해 과분한 양의 인정과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항상 그게 부러웠고 뇌내망상 속에서 내가 그들과 같은 급으로서 대화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운이 좋았던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나를 여자라는 타이틀을 떼고 상당히 존중과 함께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19세에서 20살로 넘어가자마자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기를 멈추지 못했다. 


실제로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었던 여성 은사분이 계셨고 또 한 분의 남자 선생님이 있었다. 

여성이었던 첫번째 분은 매우 유명한 공적인 기관에서 나름대로 정당한 절차로 내 첫 근로 계약서를 찍은 일을 맡겨주셨고, 일을 하는 방식도 매우 체계적이었다. 체계적인 사람이 별로 없는 그 분야의 특성상 미혼여성으로 많은 오해를 받은 분이기도 했지만, 머리에 놀 생각밖에 없는 영재들과 소통하는 법부터 어른들을 상대하는 법까지 그 분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사실 내가 미술 교육 쪽으로 나간다면 절대 놓으면 안 될 기회였고 그 분께서 가르치셨던 수많은 제자 중 내게 제안을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어야 했다. 물론 나는 행복했지만 빠르게 지쳤고 1년이 지나 일을 그만뒀다. 미술교육으로 내 성장기를 보상받으려는 안일한 마음가짐과 취업준비 등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사실 그 분께 그 정도로 인정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우연하게 1년이 지난 시점에 그 분과 함께 일을 옮기게 되었지만 내가 그 정도 끈기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똑같이 나의 성장기에 가르침을 받았던 두번째 선생님은 남자였다. 그리고 내가 그 분의 행동 하나하나에 다 쓰러져가는 갈대마냥 감정이 오락가락했을 정도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분이 만들어놓은 작은 사회, 기준, 방식들이 그 후로도 몇년 간 나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친구와 있다가도 급하게 연락이 오면 그대로 달려갔고 내 성격에 절대 하지 않을 돈 들어가는 작은 호의들, 취향에 맞춘 우연을 가장한(?) 행동들 등 그 분과 하는 일에 유난히 사랑을 쏟았던 게 내 20대 초반이었다. 사실 일이라고 하기엔 정식적인 절차나 체계는 전혀 없어 미래가치는 전혀 없었다. 돈도 항상 자유로운 일정으로 주셨고 내 능력과 노력에 비해 항상 적게 받고 있다고 느꼈다. 첫번째 선생님은 분기 회식으로 무용 공연을 보여주셨지만 이 분은 동네 치킨집에서 내 인생 첫 생맥주 만취를 겪게 해주셨다. 그럼에도 대학입시가 갓 끝난 19살부터 난 그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3년을 했고 그 후에도 몇개월 더 도와 일을 했다. 그 이유는 나만이 그 분의 가장 아끼고 필요로 하는 제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분이 주는 알바비가 사실 내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하나로 끼치지 않았고 (그걸 알고 돈을 자유로운 일정으로 준 것도 안다) 더 좋은 조건의 기회가 왔을 때도 나는 별로 흥미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좁은 사회 안에서 오직 내 마음이 가는대로 되돌아갔던 시기를 그 후에 완벽히 정리하고 이겨낸 건 아니다. 하도 각종 아저씨들을 좋아하다 보니 몇 번만 보면 내가 저 사람에게 인정받을려고 엉뚱한 땅굴을 파겠구나 싶은 촉이 왔고 대학에서도 그런 사람이 몇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촉을 의식하고 부러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으려 했다. 내가 20대 극초반 시절과 달랐던 점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구체적인 생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에 있다. (그 중년남성들이 경제적 능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은 항상 동일했다)

그 외에도 그들의 궁극적인 사랑은 아들들(혈육 뿐 아니라 정신적 아들들)만을 향한다는 것을 목격하는 일들과, 나는 그들의 애정 마라톤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은메달은 커녕 동메달도 따기 어렵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세상이 온 몸으로 정신 차리라고 던져주는 메세지들을 듣고도 습관과 관성의 힘을 무시하긴 힘들었지만 완치의 단계는 취업하고 일어났다. 더이상 "누구를 통해서" 뭘 해야만 내가 쓸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미술계의 막연함 대신 내가 순전히 노동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감각이 나를 가장 크게 가르쳤다.


내가 아저씨 나이대에게만 이렇게 열심이라는 사실이 이상성욕이 아니라 그들의 가진 여유와 위치에 대한 열망이었다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자연적으로 벗어나기는 정말 어려웠다. 아마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면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아서 가끔 등골이 오싹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바래왔던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똑바로 서는 일은 사실 시간과 변화가 필요했던 일이었음을 이제야 느낀다. 




9월에 한 생각

: 나의 대인관계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창조에 대한 감각이었다. 


대중적 취향과 대중의 수준에서 예술전공자 특유의 오만한 우월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나는 그들과 좀 다르다는 감각은 참 달콤하고 중독적이긴 해서, 나 또한 오만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란 생각을 스스로 상기시키곤 한다. 애초에 대중적인 취향이 통계적으로 뭐라 명시되어 있진 않고 정의내리는 것조차 웃긴 일이지만.. 


 최근에 엄청나게 대중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상당히 영양가 없는 몇 시간의 대화를 했다. 

그리고 또 최근에 나와 비슷한 사고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내가 속한 사회에서 떠나보내는 슬픈 일을 겪었다. 그 분과는 10분을 얘기해도 충분할 때도 있었고, 하루를 통채로 같이해도 부족할 때도 있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지만 그래서 더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사람과 얘기할 때는 질리지 않는 뭔가가 있다. 말을 지어서 설명해보자면 자유롭고 창조적인 어떤 성향일 테다. 나는 그 분을 사실 잘 알진 못하고 알고있는 몇몇의 취향도 다른 부분이 많지만 항상 더 깊어지는 대화를 원하게 된다. 그것은 지능과 수준이 달라져도 같다. 예를 들어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과 당시 22살이었던 나의 대화는 그런 면에서 순수한 즐거움이 있었다. 한 학생은 사회비판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꼭 사회에 관련된 걸 해야하냐고 물었다. 그냥 아이언맨이랑 타노스나 그리고 싶단다. 내가 자유분방한 정신으로 어떻게 사회와 타협점을 찾아가며 원하는 타노스를 그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는지 설명했다. 이럴 때 서로 이해가 되고 있다는 즐거운 감각은 내가 그래도 1년이나 일을 이어간 이유이기도 했다. 머리를 싸매더니 학원과 일정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삶을 시계 위에 그리겠다고 하는데 그 전형성이 너무 웃겨서 수업 내내 같이 웃었다. 


엄청나게 대중적이었던 전자의 사람들은 내가 조금이라도 더 스몰토크와 사소함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더 멋진 쓸모없는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몇 시간 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위선적이고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사실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감각과, 창조적인 일을 해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성향의 문제임을 느낀다. 그 중에서도 자유에 대한 감각은 나에게 너무나도 중요해서, 나의 세계에서는 mbti의 t와 f처럼 완전히 다른 체계로 느껴진다. 만난지 하루 만에도 스몰토크를 뛰어넘고 지금 얼마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지, 사회를 변혁하고 싶은지부터 말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가 앞으로 사회화해나가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타노스가 장갑을 낀 줄도 몰랐지만 그 학생때문에 타노스 장갑을 그리면서 즐거웠던 건 내가 그 공통된 감각을 너무 쉽게 얻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관심이 없는 소재인 볼빨간 사춘기 음악을 왜 그 분이 프로필 음악으로 설정해놨는지는 사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물론 굳이 내가 바뀌어야 하나 생각은 든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들과 가치들이 명확한 언어로 하나씩 규정되어 가면서 또 하나의 편견덩어리를 적립해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