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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Feb 04. 2024

엄마의 베틀 자장가


몇 십 년 전부터 기성복이 대세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좋은 세월을 만나서 편하게 살아간다. 길쌈과 바느질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시장에 가면 옷이 천지에 널려 있어 입맛대로 골라 살 수 있다. 막상 험한 인생을 살아보니 그 시대 엄마를 이해할 수 있고,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실의 벼랑을 넘나드는 동안 엄마를 닮은 추진력이 툭 불거나 왔다. 그날의 정겨운 노랫가락이 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세월이 흐를수록 유년의 푸른 뜰이 눈앞에 펼쳐졌다. 뜨거운 태양을 등에 지고 엄마는 종일 삼밭에서 낫질을 했다. 토굴에 장작불을 피워 삼을 쪄내는 일은 손이 많이 필요했다. 동네 사람들은 두레로 낮에 찐 삼을 물에 푹 불려서 껍질을 벗겼다. 저녁이면 마당에 둘러 앉아 쑥으로 모기향을 피워놓고 동네 아줌마들과 삼을 삼았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후렴구를 붙여 노래 가락이 한 숨 배씩 오고가며 고단함을 풀어내곤 했다. 종갓집 며느리로 엄마는 시집을 왔다. 3남 2녀를 낳았다. 가난한 집 맏아들인 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보니 쌀독에 거미줄이 칠 지경이었다. 천하장사 소리를 듣던 아버지가 일본에 징용을 끌려간 후 가장의 부제는 하루아침에 가난으로 내몰렸다. 엄마가 겪어야 했던 냉혹한 그 시절은 죽음보다 두려운 시대를 관통하는 동안 세월은 수십 년을 훌쩍 뛰어 넘었다.

 

어느 새 나도 엄마 나이가 되었다. 꿈속에서는 아직도 그날의 베틀 자장가 노래가 철컥 철컥 들리는 듯 물레질 소리가 귓가에 왱왱거린다. 선조 때부터 문익점이 원나라에 가져왔다는 목화씨를 산비 알 밭에 뿌렸다. 여름내 풀밭에 엎드려 땅을 엎드려 살았다. 가을이 되면 하얀 목화 솜꽃이 몽실몽실하게 피었다. 겨울밤을 하얗게 새우며 무명베를 짜서 장날마다 몇 필씩 칼로 뚝 잘라다가 팔았다. 그렇게 장만한 돈으로 오라비들에게 유학길이 열렸다. 해방이 되어 십 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오기까지 긴 세월을 억척으로 살아냈고, 특히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과 자식들까지 모두 멍에처럼 엄마를 항상 짓눌렀다. 

 

그날의 폭설이 마당에 융단처럼 깔렸다. 사각사각 싸락눈 내리는 소리와 욍욍거리는 물레질 소리가 밤새워 들리곤 했다. 아침이 되면 옥수수자루같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무명실 구리가 한 광주리씩 쌓였다. 이른 봄이 되면 마당에 숯불을 피워 베틀을 걸고 실에 풀을 먹여 솔질을 했다. 마당에 통나무로 만든 긴 다리를 뻗쳐놓고 베틀 사이사이에 쇠꼬챙이를 불에 달구어 구멍을 뚫었다. 뒷다리와 앞다리를 세워 가랫장으로 고정시켜 놓고 베틀을 걸었다. 엄마의 바느질하는 솜씨는 비단 같았고, 손에 가위를 잡으면 옷감을 춤을 추듯이 쓱싹쓱싹 잘려나갔다. 동지섣달 긴긴밤을 지새우며 베틀에 앉아 명주·무명·모시·삼베를 몇 필씩 짰다. 오 일 장날 서면 옷감을 팔았다. 그 돈으로 재봉틀 한 대를 사 왔다. 나를 양제 학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나를 위해 설득을 해도 내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멋진 세라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갔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런 마음을 몰라주었다. 그럴 때마다 심통을 부렸다. 골목길을 서성거리다가 하굣길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부러워해도 엄마는 모르세로 일관했다. 엄마는 내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여자는 공부보다는 길쌈을 배워두면 먹고사는데 실용적이라고 하였다. 안방에 바느질하는 도구가 한가득 쌓였다. 한복 바지저고리·도포· 두루마기 분을 방바닥에 펼쳐놓았다. 옷감 위에 마분지 본을 올려놓고 가위로 사각사각 재단을 하고 굵은 실로 손으로 듬성듬성 시침을 떴다. 엄마의 강압에 못 이겨 재봉틀에 앉아 박음질을 하면 삐뚤빼뚤했다. 온몸에 땀인지 물인지 줄줄 흘렀다. 양손으로 옷감을 노루발 밑으로 밀어 넣고 양 손을 밀면 겅중겅중 지나가다가 실밥이 툭툭 끊어졌다. 나는 방바닥에 옷감을 패대기치고 벌떡 일어나 산비탈을 내달렸다. 

 

밭둑마다 퍼런 뽕잎들이 너풀너풀 춤을 추며 반겨주었다. 어둑해지도록 들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끈질기게 바느질 배우라는 말로 달래다가 윽박지르며 설득작전을 썼지만 헛수고 한다. 부모에게 반항하느라 혼났던 기억이 무의식 속에서 내 마음에 그림자로 드리운다. 엄마 손은 거름손이라서 질 삼을 여러 가지를 했다. 양잠도 치느라 밤낮으로 뽕잎을 누에들에게 주었다. 누에가 한잠, 두잠, 석 잠을 자고 일어나면 통통하게 살이 찐다. 소나무 가지로 섶을 얼기설기 올려주면 고치를 지었다. 솥단지에 뜨거운 물을 펄펄 끓으면 고치실을 뽑아 명주를 짜고, 목화솜을 틀어 물레질로 실을 감아 무명 원단을 짰다. 그 돈으로 논밭전지를 일구어 놓은 문전옥답은 아들들이 공부시켜 가문을 빛낼 거라던 기대는 무너졌다. 

 

인생이란, 나도 살아보니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살아온 뒤안길에는 항상 엄마의 베틀 자장가가 찰칵찰칵, 물레 소리가 왱왱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내가 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힘들 때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못 배운 것이 아쉬움이 남았다. 도회지에서 진흙 같은 젖은 삶을 살아내려니 땅바닥에 물구나무라도 서야 했다. 그때 바느질을 야무지게 배워놓았으면 지금쯤 동대문 한복 집 사장님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의 베틀 자장가는 내가 힘들 때마다 다시 일으켜 세우는 원동역이 되어주었다. 오래 세월 엄마를 부정했던 어둠에서 깨어났다. 어려서 호된 시집살이 덕분에 시어머님과 가족들에게 겸손하고 순명하는 지혜를 터득하였다. 그 덕분에 철부지 남편도 품고 지금까지 살아 낼 수 있었다, 

 

오래전에 엄마의 베틀 자장가는 멈추었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한 손에 솜을 쥐고 또 한 손으로 물레를 돌리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가파른 인생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내가 불렀던 베틀 자장가를 자식들도 보고 듣고 자랄 수 있었다. 언제 들어도 정겨운 엄마의 베틀 자장가는 잊을 수 없는 내 마음의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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