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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Feb 04. 2024

들꽃향 친구

양수리에 사는 친구가 오월이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고 전화를 하였다. 얼떨결에 약속을 잡고 말았는데, 몇 년 만이었다. 소식 한번 없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옛 친구를 만나게 된다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모든 약속을 미루고 경의선에 올랐다. 

5년 전, 이 노선만 완공되면 용문까지 여행 가려던 계획이 있었는데 모두 묻혔다. 바쁜 탓이었다. 몇 분마다 전철이 지나가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타고 가게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안고 시원하게 짙푸른 전원 속으로 질주를 하였다. 승객들은 마스크를 쓰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친구네 집 앞이 나타났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예쁜 모자를 쓴 봄 처녀 같은 차림의 그녀가 반겨주었다. 

“얼마만이지?” 얼싸안았다. 사람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환영 인사에 바빴다. “왜, 이제야 연락을 한 거야.” 보고 싶었다는 간절함이 얼굴에 묻어났다. “날씨가 너무 좋잖아. 두물머리를 산책하며 쑥을 캐자고 불렀어.” 그 말은 뜬금이 없었다. 몇 년 만에 만나는데 나물 뜯자니, 생경했지만 우리는 손을 놓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꼭 잡았다. 촉감이 따뜻하게 가슴까지 손길로 전해졌다. 들꽃 향기가 풀풀 날리는 논둑길을 걸어갔다. 청정지역 습지에 쑥밭이 있었다. 미나리와 쑥을 한 보따리씩 캤다. 동심으로 돌아간 두 소녀처럼 세미원의 돌다리를 폴짝폴짝 뛰었다. 하늘에는 코끼리 구름들이 두둥실 떠가고 한낮이라 망태초가 배들배들 졸고 있었다. 

10년 전이었다. 아들 친구 엄마들이 기도 모임을 가졌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밥도 먹고 수다 떨면서 정이 듬뿍 들었다. 그녀가 집안에 사정이 생겼다는 말을 남긴 채 소식이 끊겼다. 회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전화번호를 바꿨는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며 늘 마음속에는 그리움을 품고 살았다. 

친구가 세미원에 들어가는 표를 샀다. 두물머리를 걸으니 찬바람이 시원하게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물을 만난 고기처럼 쌓인 보따리를 강물 속에 쏟아부었다. 햇볕에 물든 윤슬이 물살에 반짝거렸다.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남편 회사가 부도가 났었어.” 성실한 인간관계로 신뢰를 쌓았고, 사업 수완도 좋아 순풍에 돛 단 듯, 몇 년을 승승장구하던 중, 믿었던 직원으로 인해 회사가 부도가 나서 큰 낭패를 당했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파산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태풍처럼 밀려드는 빚쟁이들에게 쫓기다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두 아들이 있음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휘몰아치는 세상의 모진 바람을 몇 년 동안 견디며 기적 같은 순발력을 동원하여 사업체는 옛날처럼 회복되었다. 

인생의 황량한 들판에서 호되게 비바람을 맞았던, 그녀의 가족들이 똘똘 뭉쳐 고통을 나누었다. 회사와 가정이 안정되어 갈 즈음 이제는 감사할 일만 남았던 그때였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또 터졌다. 친구의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5년 동안 집과 병원으로 출퇴근을 하였다. 투병 생활은 길었다. 부석부석해진 남편의 몰골을 바라보며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남은 평생 당신을 꼭 일으켜 세우리라고 다짐했다. 그녀의 남편이 뇌수술을 한 후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난 후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하였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한 회한의 한마디였을까. 원망과 한숨의 세월로 꽁꽁 얼었던 가슴이 봄 눈 녹듯 녹아내렸다. 큰집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오직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만 살아가리라고 다짐하였다. 뇌 수술한 환자는 신선한 물과 공기가 최고라고 의사가 조언을 해주었다. 등산 가방에 도시락을 둘러매고 농약이 없는 청정지역에 전원주택을 마련하였다. 지난 세월을 풀어내며 두물머리 강가에 앉아 미나리를 뜯었다. 그녀의 지극정성이 통했는지 그분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다. 

어두운 터널을 헤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친구의 이야기에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는 오후였다.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고, 그들은 무역회사 직원과 신부님이 되었다. 들꽃처럼 모진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모두 우뚝 일어섰다. 동네에 궂은일이 생기면 그녀는 누구보다 실천을 먼저 하였다. 맏딸이라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지극정성으로 친정 동생들을 뒷바라지하였다. 친구들과 만나면 밥값을 먼저 내었던 그녀에게서 은은한 들꽃 향기가 났다. 그래서 그런지 숨은 천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왕갈비 집에서 점심을 사주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을 마주하고 맛있게 먹었다. 산책로를 걷다 보니 들꽃이 봄바람에 손을 흔들고 푸른 들녘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졌다. 물새들은 창공을 가르며 장엄한 군무를 펼치며 훨훨 날아갔다. 하루해가 짧았다. 새벽에 출발한 태양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지고 있었고, 산허리에 걸렸던 노을은 서쪽으로 흘러갔다. 

어둑해지니 남편이 걱정되었다. 나물 보따리를 들고 발길을 재촉하였다. 아무리 바빠도 그녀가 집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시자고 잡아끌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연분홍 꽃잔디가 활짝 피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당에는 제철을 만난 채소들이 마당을 물들였다. 지대가 높아 세미원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다. 밤하늘의 별들도 무리 지어 강물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들꽃 향기가 나를 품었다. 전철역에서도 그 향기는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 모든 건 순간이야.’ 

저만치 불빛 아래 나의 오두막이 손짓을 하였다. 곧 우리 집에 가서 미나리 보따리를 풀면 그녀의 들꽃 향기가 진동을 하겠지. 기다렸던 남편에게 친구의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맛있게 차려 주리라. 그녀의 넉넉한 품성을 나도 닮고 싶었다. 들꽃 향기는 바람에 멀리 멀리 흩어지지만, 사람의 향기는 더 오래가며, 더 멀리까지 날아간다. 친구의 은은한 향기처럼 나의 주위에 풍기는 삶을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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