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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Feb 04. 2024

인연을 품다


남편의 무릎 관절에 철심을 박았다. 밤에 두 시간마다 피 주머니를 갈았다. 눈이 호박 구덩이처럼 쑥 들어갔다. 지인들이 병문안을 와서 보신탕을 먹으라고 권유했다. 어릴 적 삼복더위 때 집에서 먹이던 개를 잡아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반려견, 말 그대로 반려견을 사랑하는 가족으로 대하는 시대가 왔다. 어디선가 컹컹 소리를 지르던 아픈 기억 하나가 손끝을 물고 올라왔다. 

초등학교 1학년. 집집마다 소· 돼지· 개· 닭을 키웠다. 가난한 살림 밑천으로 보물 1호는 암소였다. 송아지를 낳으면 오빠들 중, 고등학교 등록금을 냈다. 흑돼지는 아들딸 시집·장가보낼 때 잡았다. 개는 새끼를 낳으면 팔아서 자식들 신발이나 옷을 사 입혔다. 봄이 되면 어미닭은 알을 낳고 25일 동안 품고 있으면 부화를 했다. 그날부터 병아리들이 온 마당을 뛰어다녔다. 어쩌다가 사위가 처가에 오면, 씨암탉을 잡아주는 풍습이 있었다. 학교에서 등짝에 붙은 배를 움켜쥐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잔칫집을 찾아갔다. 품앗이로 일하는 엄마를 부르면, 돼지머리 삶은 국물에 국수를 말아 주었다. 한 사발을 먹으면 배에서 자갈 구르던 소리가 멎었다.


아침 일찍 사철탕 집 문을 두드렸다. 목젖이 보이도록 하품을 하며 부스스한 주인이 나왔다. 탕에 고기를 넣고 수육을 포장해 주었다. 잰걸음으로 집으로 왔다. 뚝배기에 쏟고 바글바글 끓였다. 부추와 후추도 뿌렸다. 남편은 숟가락을 들고 탕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보았다. 다시 수육 한 점을 왕소금에 찍어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입맛에 맞는지 국물까지 후루룩 다 마셨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그날로 이끌려 들어갔다.

30년 전 남편이 요크셔테리어를 분양받았다. 딸이 강아지 사자고 졸라 댔지만 나는 아파트에서 키울 수 없다고 거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음 약한 아빠를 졸라 거금을 들여 일을 치고 말았다. 이름은 ‘다롱이’로 지었다. 한동안은 아이들이 밥을 주고 목욕도 시켰다. 딸은 학교 가기 전에 산책시키고 배변도 해결했다. 몇 달이 지나자 눈으로만 좋아했지 뒤치다꺼리는 나의 몫이 되었다. 자식을 입양한 셈 치고 키웠다. 단독주택이라 마당 청소를 하느라 문을 열어 놓았다가 잃어버리기도 했고 다시 찾기도 했다. 성장하는 아이들 정서에 다롱이가 도움이 되었고 소중한 일원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집에 동물들이 많았다. 그중에 흰 점이 박힌 점박이를 좋아했다. 가족들 발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다 알았다. 하굣길에 동구 밖 어귀로 꼬리를 흔들며 마중을 나왔다. 허리에 책가방을 차고 온몸으로 함께 뒹굴었다.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내 얼굴에 반질거리는 땟국물을 핥았다. 어느 날 점박이가 동네 검둥이와 바람이 났다. 6개월 후에 새끼 10마리를 낳았다. 엄마는 군용 담요를 헛간에 깔아주고 밤새워 염불을 외웠다. 한 마리는 아들딸 운동화 또 한 마리는 가족들 양말과 보리쌀 한 말도 사겠다며 중얼거렸다. 개가 새끼를 낳았다고 쌀 등겨와 호박죽을 끓여 먹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허한 검둥이의 배가 채워지지 않았다.

쥐들이 극성을 부렸다. 나락 가마니를 구멍을 내고 밤새 까먹은 왕겨가 한 소쿠리씩 나왔다. 사람 먹을 양식도 부족했던 흉년이었다. 학교에서도 쥐잡기 운동에 동참하고 꼬리를 많이 잘라 가면 연필이나 공책 한 다스를 주었다. 아버지는 헛간에 쥐틀을 놓았다. 잡히면 꼬리를 잘라 열 개를 묶어주었다. 쥐를 잡고 잡아도 줄지 않았다. 면사무소에서 소탕 작전으로 쥐약을 나누어 주었다. 한날한시에 온 동네가 쌀에 약을 섞어 놓았다. 

꿈인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빨리 일어나 학교 가야지.” 

엄마의 고함 소리에 깼다. 

“엄마, 강아지 낳았어?” 

“그래.” 

헛간으로 달려갔다. 점박이는 몽실몽실한 새끼들에게 젖을 빨리고 있었다. 너무 귀여워서 학교가 파하면 마라톤 선수처럼 달려왔다. 그 설렘은 며칠 가지 못했다. 점박이가 새끼를 낳고 3일 만에, 쥐약 먹은 쥐를 먹었다. 어린 것들이 눈도 못 뜬 채. 죽은 어미 젖꼭지를 빨았다. 강아지의 울음소리와 엄마의 땅 꺼지는 한숨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아버지는 죽은 점박이를 장작불에 통째로 털을 그을렸다. 배를 가르고 내장은 모두 버렸다. 몸통과 다리 각을 떠서 가마솥에 푹 삶았다. 가족들이 호롱불 밑에 둘러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개고기를 먹었다. 이튿날 아침 가족들의 얼굴에 윤기가 반지르르했다. 하지만 어미 잃은 강아지가 열 마리였다. 밤낮으로 배가 고파 깨갱깨갱 울었다. 우리 집은 강아지 먹일 분유를 살 돈이 없었다. 밀가루 풀을 끓여 입을 벌리고 숟가락으로 떠먹여도 시름시름 한 마리씩 죽어갔다. 뒷산에 땅을 파고 묻어주고 울음을 삼켰다. 아버지는 속상했는지 냇가에 갖다 버리라고 했다. 이튿날 소쿠리에 담아 냇가 자갈밭에 남은 세 마리를 우르르 쏟았다. 

눈을 감고 집을 향해 달렸다. 까마귀들이 버드나무에서 깍깍 입맛을 다셨다. 그때 내 발소리를 듣고 한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 왔다. 뒤를 돌아본 후 발목을 잡혔다. 달려가서 덥석 끌어안았다. 다시는 너희들을 버리지 않을 거야. 세 마리를 안고 왔다. 아버지 몰래 광 속에 숨겨 두고 키웠다. 학교에 갔다가 오니 강아지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그렇게 개들과 아픈 이별을 했다.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의 유년이었다. 


어느 겨울이었다. 저녁 미사를 드리고 오는 중이었다. 눈이 쌓인 쓰레기통 옆에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멈췄다. 딸이 소리 나는 쪽으로 턱짓을 했다. 박스를 열어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떨고 있었다. 아이들은 망설이다가 엄마 눈치를 보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신호를 보냈다. 얘들아 춥다 빨리 가자. 종종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려다가 어릴 적 냇가에 버렸던 강아지의 컹컹 짖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냥 두면 겨울밤에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아들이 딱 하루만이라도 ‘재워주시면 안 될까요’ 하는 표정이 애절해 보였다. 결국 박스를 안고 집으로 왔다. 이름을 ‘명길이’라 지어주었다. 버림받고 상처 입은 놈이라 측은했다. 6개월 후 송아지만큼 컸다. 지인이 넓은 마당에서 키우기로 하고 데려갔다. 그놈을 보내고 눈물을 몇 바가지나 흘렸다. 


다롱이와 십 년 살았다. 어느 날 대문을 열어 놓고 청소했다. 그 사이 큰 개를 따라갔는지 온 동네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두 달 후에 윗동네 갔다가 승용차에서 할머니가 강아지를 아기처럼 안고 내렸다. 다롱아, 불렀더니 양 귀를 쫑긋 나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쫓아가서 덥석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분들에게는 자식 이상으로 소중해 보였다. 도저히 내 강아지 달라고 입이 안 떨어졌다. 나보다 더 필요한 곳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남편이 기운을 차렸다. 온몸으로 강아지들을 만났다. 오랜 세월 인연을 품고 살았던 점박이와 강아지 열 마리, 다롱이, 명길이었다. 자갈밭에서 버린 강아지의 환영이 스쳤다. 울컥했다. 또 다른 인연이 21세기 서울 거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가족들을 기다리며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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