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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Feb 04. 2024

장롱 속에 핀 꽃

겨울이 긴 꼬리를 감추었다. 개나리가 노란 촉을 내밀 때면, 옆에 있던 목련도 덩달아 순백의 몸을 부풀린다. 애경사가 많은 계절이다. 봄은 여인의 옷깃을 타고 온다는 말처럼 나의 여심이 꿈틀거린다. 시절이 흘러가는 대로 신체리듬도 숨 가쁘게 따라갔다. 지난해 한 번 입고 넣어둔 꽃무늬 원피스가 생각났다. 장롱문을 열었다. 옷을 몇 번 입어 보지도 못하고 계절이 바뀌었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대청소를 했다. 옷장부터 털어냈다. 장롱문을 꼭 닫아 놓아 냄새가 퀴퀴하게 옷에 배었다. 옷걸이에 치렁치렁하게 걸린 옷들이 내 손끝에 끌려 나왔다. 올봄에 입을 만한 옷이 있나 바닥에 펼쳐놓았다. 처음 본 듯한 꽃무늬 원피스가 내 시선을 끌었다. 언제 산 옷인지 아른거린다. 오랜 생각 끝에 지난봄에 선배님이 원피스 두 벌을 퀵으로 보내주셨다는 걸 기억해냈다. 한 땀 한 땀 정성껏 꿰맨 흔적은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옷 솔기마다 박음질이 철길처럼 두 줄로 나란히 달린다. 머지않아 꽃 축제가 펼쳐지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나갈 외출을 꿈꾸었다. 

몇 년 전, 기도하는 모임에서 선배님을 만났다. 바지 정장을 입고 핸드백을 들고 나갔다. 옆에 앉은 그분은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었다. 내 핸드백 색상이 우아하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선물로 드릴까.’ 조카딸이 신혼여행 때 사다 준 것이라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 식당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얻어 소지품과 책을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선배님에게 핸드백을 내밀며, “선물입니다. 선배님의 옷에 이 백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라고 말했다. 부담스럽다며 손사래를 치는 그분의 가슴에 안겨드리고 도망치듯 나와 버스를 탔다. 선물로 받은 백이지만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실행에 옮겼다는 뿌듯함이 가득 차올랐다.

8월의 중순, 선배님이 전화를 하셨다. 

“자네, 원피스 한 벌 꿰매주고 싶어. 시간이 있어 옷감을 끊으러 동대문 시장에 나왔어. 무슨 색을 좋아하지?” 

뜻밖의 제안에 들뜬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저는 옷이 많습니다. 핸드백 부담 갖지 마세요. 바지 정장만 입고 다니는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치마 정장을 입으시는 선배님에게 더 잘 어울려요.” 

말로 실랑이를 하다가 뜬금없이 “그럼 이 백 돌려줄 거야.” 하는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꽃무늬를 좋아해요.”

일주일이 지났다. 저녁 무렵, 부릉부릉 현관이 소란스러웠다. 벨이 울렸다. 문을 열었더니 검은 모자를 쓴 퀵서비스 아저씨가 비닐봉지를 문안으로 들이밀었다. 넙죽 받아서 거실에 펼쳐놓았다. 예쁜 자수가 놓인 원피스 두 벌이 화사하게 웃었다. 나를 향해 입어 달라는 듯, 얼른 입어보니 체형에 잘 맞았다. 소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옷 속에 들어 있는 쪽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깨알같이 쓴 선배님의 손편지였다. 

“바느질은 서툴지만, 옷 입어 줄 그대가 행복하라고 꿰맸으니 예쁘게 입어 줘.”

가슴이 설레었다. 장인 정신으로 한 땀 한 땀 정성껏 꿰맨 옷을 선물로 받고 보니 너무 기뻤다. 벅찬 감동은 식을 줄 모르고 가족들에게 자랑을 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원피스를 입으니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5년 후, 또 퀵서비스로 옷이 배달되었다. 네모난 포장 박스에는 장례식장에 갈 때 입으라고 하얀 속치마와 검정 마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장롱을 열어젖히고 원피스를 모두 꺼냈다. 이 옷 저 옷을 번갈아 입어 보았다. 어느 날 검정 원피스를 장례식장에 입고 갔더니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이 옷 어디서 맞췄어요?” 

친한 선배님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분은 손녀딸 옷을 손수 꿰매주기 위해 늦은 나이에 바느질을 배웠다고 했다. 자신의 재능을 이웃과 지인들에게 나누며 칠십을 넘겼다는 그분의 마음처럼 내 마음도 넉넉해져 어깨가 으쓱하였다.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싱그럽게 웃는다. 사계절 꽃이 피고지고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꽃무늬 원피스는 볼수록 아름다웠다. 기분이 축 가라앉을 때마다 입고 외출을 했다. 정성이 담긴 옷 덕분에 품위 있고 마음이 포근해졌다. 옛날에는 삼한사온이 뚜렷하던 사계절이 무너졌다.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여름인가 싶으면 가을이라, 날씨가 변덕스럽게 널뛴다. 장롱 속에서 긴 잠을 자고 있던 옷들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햇볕에 환기를 시켜주면 화사하게 빛났다. 선배님은 딸부잣집 맏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으로부터 듬뿍 받은 사랑이 내게서 활짝 피었다. 무엇보다도 털털한 나의 옷매무새를 보완해 주어 단정한 모습으로 빛나게 해주었다.

시절이 가파르다. 신체 리듬도 변화의 물결에 숨 가쁘게 따라간다. 새들은 창공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올랐다. 참 좋은 계절이 왔다. 결혼 초에는 치마 정장을 즐겨 입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키우느라 거추장스러운 정장은 부담스러웠다. 바지 정장만 입는 나를 보고 남편이, “여보는 옷차림에서 여성의 매력이 반감한다.”라며 진담을 농담처럼 했다. 그때마다 발끈해서 당신은 내가 한가한 사람으로 생각하냐며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그 후 나들이할 때는 치마 정장을 입고 외출했다. 선배님의 집을 방문한 적이 한 번 있다. 무릎에 붕대를 칭칭 감고, 허리에는 복대까지 했다. 낡은 재봉틀에 앉아 수작업으로 옷을 박음질하고 정성껏 완성해갔다. 

몇 달 전이다. 선배님이 무릎관절 수술을 했다. 한 달 동안 재활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늙은 호박과 찹쌀을 넣고 호박죽을 한 솥 끓여 배낭에 메고 문병을 하러 갔다. “선배님, 빠른 회복을 빌어요.”라며 손을 꼬옥 잡아 드렸다. 금방 큰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러한 고마운 마음과 정으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인연을 이어간다. 이 세상 주고받는 정에는 공짜가 없다. 서로를 배려하다 보면 마음의 공간도 넓어지지 않을까. 

장롱 속에서 활짝 피는 꽃무늬 원피스가 아름다웠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간다. 맑은 시안詩眼으로 서로 품어준다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분에게 받은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은은한 꽃향기를 멀리멀리 풍기는 삶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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