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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Aug 16. 2024

풀치지 않는 오해

20년 전이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 외출을 하는 중, 골목길에서 지인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하며 그의 아내가 무척 힘들어한다며 혹시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지금 당신 부인을 만나 위로를 좀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계획한 일이 꼬였다고만 했다. 약속이 있었지만 야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숨도 못 잔 푸석한 얼굴로 머리는 헝클어진 채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내내 답답하다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화가 가득 차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나의 위로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남편이 선거에 나왔는데 도와주던 사람이 상대 후보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했다. 남들이 알면 안 되는 민감한 사안이라며 어디에도 말을 할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난밤에 한잠도 못 잤다며 알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경제적인 형편도 어려운데 그 상황에 남편이 뜻을 굽히지 않아서 무척 힘들다는 거였다.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쏟아졌다. 서너 시간이 흐르고 어쩔 수 없이 선약이 있다며 둘러대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또 붙잡혔다. 사람에게 배신당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오른다고 말을 하더니 갑자기 ‘악’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너무 흥분했던 것 같았다. 얼굴이 홍시처럼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하얀 거품을 내뿜고 몸이 꽈배기처럼 뒤틀렸다. 그러고는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히더니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질렀다. 


“도와주세요. 여기 119좀 불러주세요.”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다가 몸이 점점 굳어갔다. 구급대가 올 때까지 발만 동동 굴렀을 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없이 문을 열었다. 간단한 상황 설명을 하라는 말에도 혼이 빠져 제대로 말을 못 했다. 환자와 보호자 이름을 겨우 대답하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나는 그때부터 걱정이 되었다. 방에 단둘이 앉아 있다가 쓰러졌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 집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무 일도 없이 건강하게 돌아오기만을 하늘을 향해 호소할 뿐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이었다. 그녀가 붙잡아도 뿌리치고 일찍 나왔어야 했나 자문해보기도 했다. 그녀는 응급실에서도 깨어나지 않아 뇌수술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한 달 두 달 지나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마치 나로 인해 모든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처음 병문안을 갔을 때 나를 외면했다. 억장이 무너지기야 그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깨어나지 않으니 그날의 상황을 버선목처럼 홀랑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었다. 온몸에 피를 말리며 나는 시시각각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그녀는 6개월 만에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며 3년 동안 재활치료를 하고 거의 회복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퇴원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나를 보자 그날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며칠 밤을 못 자서인지 두통에 시달렸고 얘기 중 계속 아파 와서 진통제 두 알을 복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분노가 폭발했다고 했다. 그 얘기에 그녀의 딸은 나를 쳐다보며 만약에 여사님이 옆에 안 계셨으면 어머니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며 감사해했다.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얘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만 보면 아직도 외면한다. 자신의 일이 잘못된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인지, 오해해서 미안한 것인지 아직도 나를 외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때 놀란 상처로 무척 힘들었다. 그녀의 남편이나 자녀들도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살다 보니 좋은 일을 하고도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세상사, 모순투성이고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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