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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 Jul 08. 2021

같지만 다른 계획

'지리산 가기'라고 했지 '여행'이라고 안 했다.

2020년, 우리는 새 해 계획을 함께 세웠다. 각자가 원하는 크고 작은 새해의 계획 중에는 함께 하기로 한 것들도 몇 가지 있었다. 그중 '지리산 가기'가 대표적이었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는 않았지만, 2020년의 언젠가 지리산에 꼭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 해 늦은 가을, 우리는 잊어뒀던 새 해 계획을 떠올렸다. 찬바람이 불고 어느새 붉게 물들었던 단풍도 하나 둘 낙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더 늦어지면 못 가겠다 싶던 차에 드디어 산행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코스를 짜는 게 먼저였다. 당일치기 코스를 생각했지만 지리산은 높고 험해 당일로 가려면 큰 결심이 필요하다. 새벽 첫 차를 타고 이동해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산을 오르기 시작해, 다시 뉘엿뉘엿 해가 질 때까지 쉼 없이 바위와 계단을 오르내려야 완등이 가능하다. 당연히 체력도 문제가 된다. 평소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던 내가 지리산을 오르고 난 뒤 정상적으로(?) 출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사실은 '꼭, 꼭대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행이란 자고로 식도락과 여유를 즐기는 것. 나는 지리산 중턱에서 정상을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산행을 마친 느낌일 게 분명했다. 


나는 짧은 코스를 찾아왔고, 둘레길을 걷는 것은 어떨지 물었다. 아예 산행 전날 펜션에 하루 묵으며 바비큐 파티도 하고, 근처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B : 혹시 많이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나 혼자 다녀와도 돼, 진짜로



아차?! 함께 여행을 계획했던 B의 입장은 좀 달랐다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된다. 처음에 한 귀로 흘려들은 게 문제였을까. 두 번 세 번 같은 멘트를 듣고 나니 그제야 그 뜻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 한날한시에 함께 세운 계획이었으나 서로 다른 계획이었던 것이다.


B의 계획은 '지리산을 가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리산에 발자국을 찍고 오지 못하면 크게 의미가 없다. 여차하면 혼자서라도 다녀올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지리산이 아니라 바다라도, 계곡이어도 장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한 해가 다 지나갈 즈음에서야 알게 된 새해 계획의 두 정체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당연히 B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지. 동상이몽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절감하며, 서로의 다름에 감탄하며, 한 동안 이 에피소드는 나에게 문득문득 떠올라 웃음을 주는 충격의 웃음 버튼이 되었다.



사람들의 성향은 서로 참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종종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거나 의도치 않은 상심을 맛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나라면 생각지 못했을 감정'이나 '해보지 않았을 경험'을 선물하기도 한다. 게다가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는 과정은 얼마나 신선하고 즐거운가. 오랜 시간 알아왔던 B와 나의 다른 점 하나를 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리산은 어떻게 되었냐고? 우리는 산 중턱에 있는 숙소에서 하루를 묵으며 근처의 삼겹살 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짧지만 정상까지 갈 수 있는 코스를 택해 지리산 꼭대기 천왕봉에서 기념사진을 왕왕 남기며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여행을 마쳤다.


지리산이면 어떻고 동해 바다면 어떨까. 여전히 나에게 여행의 장소는 큰 의미가 없다. 물론 나는 상관없으니 B가 원한다면 어느 곳이던 기꺼이 함께 갈 것이다. 대신, 서로의 계획 일부 수정!  :D

각자의 계획이 함께 완성되는 경험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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