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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스 Dec 01. 2020

오후4시

금빛보단 더 노오란,

포근함이 부러스러지는 오후 4시가 좋다.


오후4시.

광안리 끝자락 커피 전문점 2층 창가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노트북과 다이어리는 펼쳐만 둔 채, 잘 마시지도 않던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멍'의 시작.


파도소리가 들린다.

여기서부터 바다까지 못해도 1키로.

몹시 튼튼해 보이는 통창 너머로 광안대교가 손톱만하게 보인다.

파도소리라니, 들릴리 만무하다.


하지만 오후4시의 바다엔 파도소리가 옵션이다.

금빛이라고 하기엔 누런 색이 감돌고,

아지랑이같은 먼지가 포슬포슬 날아다니는 빛 덩어리 속에는,

지금이 영하 3도라도 따뜻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상상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2월 오후4시, 광안리


광안리의 파도는 달려와서 부서지고를 반복한다.

물보라는 쉴 사이 없이 고운 모래 위로 튕겨나갔다가, 이내 돌아간다.

이 모든 것들이 오후4시엔 금빛이다.


10년 전 나의 오후 4시는 그랬다.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선다.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오후 4시.

겨울이라 이미 태양의 고도가 낮아져 곧 해가 떨어질 것 같다.

뛰어가는 아이를 부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발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인다.


높다란 아파트 사이로 빛이 내린다. 금빛이다.

하필 빛은 내 아이를 관통한다.

따뜻한 금색의 빛 속에 갇힌 아이를 본다.


오후 4시구나. 4시였어.

오후 4시 따위를 생각해 내다니.


멈춘다. 내 아이를 가뒀던 그 빛 속에 나를 가둔다.

그리고 무언가 시린 듯한 느낌에 몸을 움츠려 한참을 더 멈춘다.


매일을 그렇게 시계를 본다, 내 시계.

아이 둘이 등교를 한 날이라면 12시까지 허둥대며 집으로 돌아갔다.

월요일 6시면 아이들을 학원에서 픽업하고,

매일 저녁 8시 20분 양치를 시켜 아이를 재우는데 쓰고 있던 내 시계 말이다.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갑자기 그랬던 것 마냥

9년 동안 나는 '나의 시간'이 아니라 아이들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오후 4시면 광안리 바다의 금빛 파도를 즐겨 살던 내가...


오늘에서야, 오후4시에, 잃어버린 나의 시간들을 생각해본다.

잃어버린건지, 잊었던건지 기억은 분명치 않다.

어쩌면 내가 버린건 아닌지.


'엄마, 가자' 불쑥 끼어드는 아이의 목소리.

나와 내 손을 잡은 아이의 손까지도 온통 금빛이었다.



오후4시가 지난 건지, 금빛이 나를 깨운 건지

어쨌든 나는 잰 발걸음으로 금빛 햇살 속을 탈출한다.


돌아오는 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는 시계를 보고, 오늘 저녁 식사를 구상한다.


오후 4시였다.

그렇게 좋아했던 나의 시간.

2020년 11월 오후4시

실루엣마다 솜털까지 뽀송뽀송 살아나는 그 시간 속에,

아이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

그저 우린 그 시간의 금빛 속을 함께 지난다.


그렇게 오후 4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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