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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지망생 Sep 02. 2023

네 번의 인도, 한 번의 파키스탄 (4)

갠지스강물을 마시고 배탈이 나다, 바라나시 학교 일일교사체험

4장  바라나시! 바라나시!


처음 본 바라나시는 내가 생각했던 인도 그 자체였다.

 

사실 첫 여행 때 바라나시를 가 보지 못해 많이 아쉬웠었는데 그 한을 풀게 된 것이다. 나는 새로운 도시를 가면 늘 가장 좋은 숙소에서 묶으며 여독을 푼다. 그다음에 저렴한 숙소로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K라는 동행이 있었기에 K에게 우선 양해를 구했다. 숙소비는 내가 부담할 테니 일단 오전이랑 오후까지는 숙소에서 좀 쉬고 저녁때 저렴한 숙소를 찾아보라고 했더니 다행히 K가 동의했다.

각자 숙소에서 번갈아가며 샤워와 낮잠을 자고, 오후가 되어 바라나시 가트방향으로 향했다. 내가 묶었던 호텔은 시내에 있고 저렴한 숙소는 갠지스 강가를 따라 있다. 우리가 간 곳은 한국인에게 유명한 옴레스트하우스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특이하게 국적별로 선호하는 숙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본인이 자주 묶는 숙소는 구미코 게스트 하우스이고, 한국인은 옴레스트 하우스에 많다. 가격은 그때 시세로 구미코 게스트 하우스가 1박에 60루피 (1800원), 옴레스트 하우스가 80루피(2400원) 정도였으니 가히 바라나시 숙소 중 끝판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도미토리 기준이고 싱글룸은 200루피 정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고자 나도 다음날부터는 옴레스트 하우스에서 머물려 보려고 미리 방을 선점하고 (물론 싱글룸으로 예약했다, 그때의 나는 체중이 많이 나가 코를 심하게 골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 도미토리에서는 묶지 않았다) K와 함께 근처에서 식사를 했다.  


바라나시의 물가는 그때 체감상 델리에 비해 50~70%였던 것 같다. 그때는 지금처럼 유튜브나 인스타가 발달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인도여행 카페나 블로그에서 맛집들을 추천하곤 했다. 


나는 사실 그런 것을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내가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라나시의 블루라씨가 유명했는데 우리도 그것을 먹으러 갔었다. 역시 인도답게 위생은 뒷전이지만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으면 시원하고 달큼한 라씨를 아주 싸게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은 여행기이지 여행정보지는 아니기 때문에 세세한 금액을 달아드리지 못해 독자들께 죄송한 마음이다. 여행 때 따로 가계부를 쓰지 않는 데다가 순수하게 기억에 의존해 쓰기 때문에 정확한 값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라나시에서의 일상은 그야말로 내가 바랬던 인도생활이었다. 

처음에 잡았던 옴레스트하우스는 에어컨이 없어 비만인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값은 두 배였지만 에어컨이 나오는 바라나시의 AJ Guest House로 하루 만에 짐을 옮기고, 잠은 에어컨 숙소에서 자고 낮시간동안은 옴레스트하우스에서 한국인 여행객들, 그리고 K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때 있던 멤버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멋진 분들이었다. 성함을 기억 못 해 그냥 묘사로 대신하고자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분들은 아버지께서 남매를 데리고 인도 바라나시에 요가 자격증을 따러 온 여행객들이었다. 누나와 남동생이었는데 남동생은 중3 나이여서 홈스쿨링을 하면서 여행 중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K의 동향 출신의 여행객도 있었다. 나처럼 갠지스 강에서 수영을 하는 멋진 청년이었다. 인도를 너무 사랑해 몇 개월째 여행 중인 분도 계셨다. 낮에는 각자 자신의 일정에 맞게 여행을 하고 밤이면 옴레스트하우스에 모여 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함께 불렀다. 가끔 유럽친구들로 합류하는 아주 이상적인 게스트하우스였던 것 같다. 


갠지스 강의 유래를 아는가?

사실 강 이름이 갠지스가 아니라고 한다. 

인도인들은 갠지스가 아니라 Ganga (강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강의 신성함에 존칭 Ji(지)를 붙여 Ganga Ji라고 하는데 아마 그 말이 갠지스로 바꾸어진 게 아닐까 하는 게 내 추측이다. 

바라나시에서 유명한 보트투어가 있다. 

아마 바라나시 여행한 사람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철수네 보트'이다. 빠하르간즈의 '만수네 짜이'만큼 유명하다고 생각한다. 

철수의 동생인지 친척인지 하는 친구가 하는 보트투어에 참여했다. 

그 친구가 갠지스강이 아주 신성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마시기도 한다면서 갠지스 강물을 떠서 마시는 것이 아닌가?

저들이 하는 것을 내가 못할 리가 없을 거란 무모한 생각에 나도 강물을 떠서 마셨다.

그것도 두 번이나!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는 설사병에 걸려 그야말로 사흘 내내 물똥만 쌌다. 

먹는 족족 설사를 해야 했고, 나중에는 물조차 먹기 힘들었다. 

그때 내 숙소는 비싼 곳이어서 갠지스강물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탈진해서 쓰러져 갠지스 강물이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들을 보며 그냥 눈물 흘렸던 기억이 있다. 

난 왜 인도에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힘든데 왜 난 힘들다고 말할 사람조차 없게 살았을까? 

그때의 내 숙소 방에는 눈물을 흘리는 나와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은 아이유의 '좋은 날'이 블루투스 스피커로 울릴 뿐이었다. 


모든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 미화된다고 했던가!

그땐 참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땐 지금보다 어렸고 희망이 더 많았던 듯해서 가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다시 돌아가면 갠지스강물을 마시겠냐고?

글쎄, 아마 또 그러지 않을까? 


설사병은 며칠 지나 가라앉았고 나는 조금 나른하고 지루하지만, 의외로 시간이 잘 가는 바라나시의 마법에 빠진 채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주 특별했던 하루가 있어 그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그때의 사진과 동영상이 모두 사라져 버렸는데 개인적으로 이 날의 추억들이 가장 아쉽다. 

내가 바라나시에서 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근처 식당에 가서 100루피짜리 오믈렛과 짜이를 마신다. 오전에 가트에 나가서 갠지스강물을 바라보다 더워지면 숙소에 와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아이유의 '좋은 날'을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아니면, 인도에서 인도 관련 영화들을 봤다. 

내가 여행할 때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실제 여행지에서, 그 여행지가 배경인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다. 


체코 프라하를 여행할 때는 '프라하의 연인'을 봤다. 드라마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뜨면 내가 드라마 속의 공간으로 순간이동한 듯하여 정말 기분이 환상적이다. 

바라나시에서 봤던 영화는 인도에 관한 독립영화였다. 배경이 바라나시의 뿌자였기 때문에 역시 영화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그 영화 속에 있었다. 


졸리면 낮잠을 자고 안 졸리면 땀을 식히고 이번에는 바라나시 골목 탐험에 나섰다. 

바라나시의 골목은 그야말로 거미줄로 된 미로이다. 

길을 잃기 십상이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길을 잃으면 일단 갠지스 강가 쪽을 물어서 그쪽으로 쭉 가면 된다

가트만 보이면 그때부터 가트를 따라서 이동하면 내가 묶고 있는 숙소의 지붕이 보였기 때문에 길 잃을 걱정이 없이 미로 탐험을 할 수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는 날 나는 골목을 다니고 있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14~5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본인의 쓰러져 가는 판잣집 앞에 돗자리를 깔고 수학 미분을 풀고 있는 것이다. 

수학강사라는 직업병이었는지 그 옆에 걸터앉아 어떤 문제를 푸는지 쳐다봤다. 

아이의 집중력은 대단해서, 몇 분간 내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풀더니 결국 그 문제를 해결했다.

해결하고 나서야 옆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는 것 아닌가?

수학을 이 정도로 하면 영어를 꽤 잘할 것 같아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자신은 수학을 좋아하고 오늘은 오후에 학교를 가는 날이라고 했다. 

바라나시에 공립학교가 몇 군데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찾아갈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그 학생에게 구경가도 되냐고 물었다. 

옆에 가게에 가서 시간을 보고 오더니 이제 갈 시간이니 같이 가자고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를 따라 바라나시의 공립학교로 갔다. 

여학생은 거의 보이지 않고 모두 남학생이었다. 

학생은 나를 교무실로 이끌었고 교장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격하게 환영했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허락하시면 수업을 참관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오케이라고 하며 나를 데리고 운동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나와 비슷한 세대 때 학교를 다닌 사람은 알 법한 전형적인 운동장 조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때 나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100여 명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일본에서 온 영어강사라고 소개했다. (사실 나는 국, 영, 수, 사, 과 모두 가르치는 잡강사지만 여행할 때는 그냥 영어강사라고 한다)

조회에 나온 학생 중에는 옴레스트하우스에서 하우스키핑을 하는 Raj도 있었다. (인도 남자 중 뻥 안 보태고 30%는 Raj라고 느낄 정도로 흔한 이름이다)


내가 참관한 첫 번째 수업은 영어 수업이었다. 놀랍게도 교장선생님이 영어 담당이셨다. 

수업을 조금 진행하시다가 갑자기 나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참관수업을 해 줄 수 있냐고 하셨다. 

사교육 강사인 나는 사실 공교육 교단에 한 번쯤 서는 것을 꿈꿔왔다. 

그 꿈이 인도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30여 명의 인도 꿈나무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교육의 힘이었다. 

사실 한국전쟁 직후의 한국의 GNP는 인도보다도 낮았다. 내가 두 번째 인도여행 시 한국의 GNP는 선진국 반열에 있었고 그 이유를 나는 교육의 힘으로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까 내가 봤던 학생의 예를 들면서 (따로 기록이 없어 그 학생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오늘 한국의 미래와 비슷하게 인도도 발전할 거라는 희망을 봤다고 이야기했다. 

여담이지만, 코로나 직전 모디총리 이후 인도는 중국의 경제발전속도를 따라잡을 만큼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타국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경험은 정말 누구나 가지지 못할 경험일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거기 있는 아이들과 사진도 찍어주고 같이 이야기도 하면서 놀았다. 


두 번째 시간은 음악시간 참관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새로 온 영어선생님인 줄 아는 듯했다. 

우리나라의 옛 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인도는 스승의 발에 손키스를 했다. 

들어오는 학생마다 원래 음악선생님의 발에 손키스를 하고 내 발에도 손키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척 놀랐지만, 내가 거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 듯해 즐거운 마음으로 그 대접을 만끽했다.


그때 그 모습들을 영상으로도 찍었었는데 보관을 잘 못해 없어져 버려 너무 아쉽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꽤 강렬했는지 단지 글로 회상하는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한 편의 영화처럼 그때의 장면과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5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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