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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Feb 14. 2023

아들 노릇

할아버지가 거는 전화를 자주 안/못 받았더니 요새는 많이 걸진 않으신다. 대신 동생에게 많이 걸어오셨던 걸로 알고 있다. 아빠와는 매일 통화해서 안부를 가장한 잔소리를 하신다. 아빠는 전화에 할아버지 연락처가 뜨는 즉시 전화를 받는다.


나는 별이 키우느라 정신없다, 직장 다니느라 바쁘다,라는 핑곗거리가 있지만 동생과 아빠에게는 그럴 만한 것이 없었다. 집안일 하나하나를 다 알고 싶어 하시고 결정적으로 그 궁금증을 못 참고 내뱉는 어르신인지라, 누군가 단호하게 말하지 않으면 계속될, 일종의 괴롭힘이었다. 할아버지께는 이제 더 이상 집안일의 결정권이 없는데. 선한 자식들 덕에 큰 효도받으며 살고 계시는 건데 할아버지의 생각은 여전히 다른 방향인 것 같았다. 아빠와 동생은 단호하게 말할 자신이 없어 전화를 다 받아주는 편이었다면, 나는 그 자신이 없어 자주 피하는 쪽이었다.


동생 결혼식에 눈물을 쏟으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내 마음이 약해졌나 보다. 예식날 저녁에 걸려 온 전화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허한 마음 - 우리 막내까지 결혼을 했다/할머니가 이걸 보고 떠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을 나도 알기에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었다. 통화 중 할아버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경사에 왜 이렇게 우시냐며 할아버지를 위로해 드렸다.


"너희 아빠가 걱정이다. 그렇게 아픈 티가 나서 어떡하냐. 네가 잘해야 된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은 혼주였어도 아빠의 병증은 겉으로 드러날 정도였다. 표정이 없었고 손도 미세하게 떨렸다. 오랜만에 큰아들을 만난 할아버지는 그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해 보였다. 거동에 불편함도 하나 없었고 식사도 약주도 아주 잘하셨다.


동생이 결혼해서 집을 떠나니 이제 곁에서 아빠를 살뜰하게 챙기던 딸들의 존재가 모두 사라진 셈이다. 태생이 선한 동생은 아무렇지 않게, 살갑지도 무뚝뚝하지도 않게 아빠를 챙겨 왔었다. 할아버지는 그게 못내 걱정된 모양이다. 그러니 친정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나더러 그 역할을 이어하라는 말씀이겠지. 나도 당연히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빠의 병증이 걱정된 것은 알겠으나 이 순간조차도 엄마에 대한 일말의 언급도 없는 것은 화났다. 현재 가장 가까이에서 아빠를 보조하고 있는 사람도 엄마고 은퇴 이후로도 어려움 없이 생활을 꾸릴 수 있었던 것도 연금생활자인 엄마 덕이다. 할아버지가 오늘날까지 편하게 지내시며 그 어떤 세상 풍파로부터도 안전했던 것은 엄마가 아무 말 없이 그 시절을 견디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큰딸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체념의 마음으로 견디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씀했다.


"네가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단 말이야, 아버지한테. 알았지?"


그 대목에서 피가 식는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울먹임에 동요되던 감정이 깨끗하게 가라앉았다. 걱정 마시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백 살이 가까워 가는 어르신. 평생을 여자들의 도움을 받아 생존해 놓고서 이제는 나더러 아들 노릇을 하란다. 어린 시절 느꼈던 억울함이 새삼 떠올랐다. 집안에 큰 행사가 있으면 사촌 남동생이 아들이란 이유로 제일 앞줄에 섰다. 그 아이는 음식 장만이나 잦은 심부름과 무관했다. 그 아이의 어머니 역시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사람이었다. 우직하고 묵묵하게 자기 할 일 하며 인내하는 사람은 평생을 고생했고, 아들 가졌다는 이유로 잘 빠져나가던 사람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 그런 것들이 내 핵심에 억울함의 정서를 만들고 지나갔다. 지금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렇게 숭배하던 가치가 변화한 지 한참이 되었고 내가 읽고 접하는 발칙한(?) 텍스트나 매체가 상당하니까.


그런데 왜일까. 시간이 갈수록 할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더 생각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열심히 챙겼고 지금은 아빠와 엄마를 챙기며 그들에게 훌륭한 '직계비속'이 되기를 열망하는 나인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아들이 되지 못한 나에 대해 생각하는구나. 그 생각이 바뀔 리 없고 그렇게 살다가 가시겠지만 왠지 지금은 그분이 불쌍하다는 느낌도 조금 든다. 어쨌든 다시는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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