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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Feb 13. 2023

착한 연극의 무대에서

일_일기

© Pixaline, 출처 Pixabay


직장에 새로운 관리자가 발령 왔다. 이번에 승진한 인물이라 관리자B의 자리에 앉게 됐다. 그분이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직장에 나온 날이 공교롭게도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 점검일이었다. 외부 손님이 점검자로 오시기 때문에 별도 장소를 선정해야 했고 한 달 전에 정해놓았던 곳이 갑자기 정전되는 바람에 급히 다른 회의실로 위치를 바꾸어야 했다. 모두가 바쁜 날에 정전이라니, 성가신 일이 생겨버렸다.


내가 업무처리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부장이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내게 말했다. 굉장히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저... 관리자A께서 전화를 하셨는데요. 지금 관리자B께서 회의실을 청소하고 계시다는데... 청소 여사님도 연락이 안 돼서 저보고 빨리 같이 청소하라고 하시는데, 제가 지금 너무 바빠서 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관리자A와 부장은 가까운 선후배 사이고 나는 외부 서클의 사람이었으므로 관리자A는 내게 직접 연락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무 관계에서 ‘청소’라는 일이 생긴다면 내가 자발적으로 할 수는 있어도 그걸 누가 누구한테 하달하는 형식으로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예 기존의 친분 바탕으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이라면 모를까. (청소라는 행위의 중요성을 차치하고 조직 내의 미묘한 관계 양상에 따르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부장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의 의미를 읽었다. 빗자루 잡는 걸 꺼리는 성격도 아닌데 지금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진짜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인 거다. 하달이 아닌 부탁으로 요청하는 것의 의미도 충분히 읽혔다. 그래서 ‘내가 하겠다’며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 근처에서 만난 관리자A는 나를 보고 반색하며 B에게 ‘이 분이 담당자니까 맡기고 나오시라’고 말했다. 그 말이 썩 기분 좋지 않았지만 새로 와서 모든 것이 낯설 B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다는 생각에 ‘저 주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B가 내게 빗자루를 건네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이가 적지 않은 담당자와 초면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빗자루를 건네준다? 그걸 할 사람이라면 자진해서 회의실 청소를 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래서 나는 A에게 대신 ‘제가 마무리하고 갈 테니 먼저 가 계세요. 바쁘시잖아요.’라고 말했고 A는 ‘그럼 그럴까요?’하며 마지못한 듯이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A도 B를 두고 가기 머쓱했는데 내가 한마디 해 주니 훨씬 마음이 편했을 거였다. B는 여전히 꼼꼼하게 청소를 하고 있었고 나는 벽에 붙은 전지류를 떼어내며 거드는 시늉을 했다. 사실 그 전지가 붙어 있든 말든 오늘 일정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다만 허리를 굽혀가며 청소하는 분 옆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멀뚱멀뚱하게 서 있고 싶지 않았다.


청소가 끝나갈 무렵, 부장이 막대 걸레를 들고 뛰어 왔다. 바쁜 용무가 좀 끝나서 마무리하겠다고 온 것이다. 그 뒤로 관리자A도 따라왔다. 그래서 좁은 회의실에 관리자A, B, 부장, 나 이렇게 네 명이 북적거리는 꼴이 됐다. A는 갑자기 장소가 바뀌는 바람에 청소 여사님이 놓치셨던 것 같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B는 괜찮다며 허허 웃고, 부장은 막대 걸레로 바닥을 닦으려다가 난방 문제로 물이 얼 수도 있으니 안 하는 게 좋겠다는 A의 말에 어색하게 방향을 돌렸다.


나는 그 틈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관리자B는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청소를 시작했을 것이다. 경력이 있으니 오늘이 모두가 바쁜 날이란 걸 알고 있었을 것이고. 관리자A는 그걸 말려야 했을 것이기에 (처음 온 분에게 ‘그래요, 청소 한번 해 보세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부장한테 전화했을 것이고, 부장은 너무 바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내게 부탁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내가 ‘그건 내 일 아닌데요?’라고 말했으면 모두가 불쾌한 결과가 되었을 것이고, 사실 몇몇 동료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종종 그런 반응을 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과정의 목표가 회의실을 깨끗하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간의 관계 설정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말하자면, 모두가 적절한 연극을 한 거다. 착한 연극. 관리자B는 겸손하고 솔선수범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전달했고, 관리자A는 텃세 없이 그분을 구성원으로 끌어안고자 하는 의도를 전달했다. 부장은 관리자A에게 착실한 후배 위치를 단단하게 보여주었고 평소와 다르게 말끝을 흐리며 쭈뼛거리는 부탁을 함으로써 내게 어쩔 수 없는 부탁이었음을 충분히 전달했으며 마지막에 막대 걸레를 들고 뛰어오는 모습으로 그것을 완성했다.


그리고 업무 점검이 시작되었을 때에 관리자A와 부장이 꼼꼼하고 일 철저하게 잘하는 담당자라는 말로 나를 치켜세워주며 외부 손님에게 ‘우리 애 예쁘죠?’ 식의 우쭈쭈를 실시했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착한 연극 무대에 나 또한 올라와 있음을 알았다. 즐거웠다. 왜냐하면 관계 설정의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속에는 상대를 향한 조심스러운 애정 또한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의 변론》을 읽고 남겨둔 서평을 끌어오며 이 글을 맺는다. ✅


형식적 가치인 품격과는 달리 ‘존엄’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권리이며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내적 가치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소중한 내적 가치를 위하여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의 어린 시절 일화가 소개된다.

계곡으로 물놀이를 가려던 참에 한 친구가 ‘나’의 집에 들른다. 다리가 불편한 ‘나’는 계곡 수영을 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뭘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친구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빨리 수영 가라. 나 좀 자야겠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가기는커녕 소파에 드러누워 ‘피부 관리해야 돼서’ 계곡에 안 간다고 대답한다. 겨울에 로션도 안 바르는 친구 대답에 기가 찬 ‘나’가 얼른 나가보라고 재촉하자 친구는 못 이기는 척 나가다가 돌아와 만화책 몇 권을 ‘나’에게 던져주고 간다.

저자는 이 두 아이가 상황의 진실(실재)을 공유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연기 내용을 조율하며 무대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와 행동에는 거짓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들은 진실을 바탕으로 무대를 구축했다. 존엄을 위한 퍼포먼스는 이런 것이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대학 동기 앞에서 육아가 화제가 되었을 때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친구, 시한부 선고받은 가족 앞에서 평소처럼 대화 나누며 식사하는 가족들, 카페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 자폐 아동에게 무관심한 척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는 대학생. 서로가 욕망과 자존심을 가진 인격체라는 점을 인정한 상태에서 연기하고, 이런 퍼포먼스는 그들의 관계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들어준다. 연극 무대와 같이, 이때는 서로의 연기가 표면적으로 거짓이더라도 실재와 동떨어지지 않는다.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존엄은 ‘구성되는’ 것이다. (https://blog.naver.com/eynyk/221559003005 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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