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 교사가 되어 발령을 받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근처 학교에 근무하시는 대 선배님이 연락을 하셨다.
”운영계획이랑 교육계획 세웠으면 좀 보내줄래?” 나에게는 전년도 근무하시던 선생님께서 내가 신규 발령임을 알고
이전 연도에 운영하셨던 것을 바탕으로 준비해 주신 운영계획이 있었고 그 자료를 보내드렸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었다.
나중에 그 학교에 방문했을 때 알았다. 내가 세운 계획들이 이름과 학교만 바뀌어 홍보 자료로 쓰이고 실적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속상하고 분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이어지는 연락에도 계속 자료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들기엔 너무 선배였고, 요청에 대답하지 않기에는 내가 너무 치졸한 사람인 것 같았다.
반면, 아주 멋진 언니도 만났다.
발령받아 처음 맞이한 여름방학의 설렘은 무자비한 공문 한 통으로 엉망이 되었다.
방과후 학교가 무엇인지, 여름 계절학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내가
교육청에서 발송한 계절학교 중심운영교, 운영 담당교사에 떡하니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가 교육청 바로 옆에 있던 학교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학교만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지역의 학교들이 모두 참여하는 여름방학 계절학교를 운영하라고 하는 것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그때 구원자 언니가 나타났다.
“내가 진행할게요. 선생님 학교에서 운영하게 되었으니 장소 제공에 도움을 주세요.”
그 선배는 멋지게 그 한마디를 남기고, 모든 진행의 총대를 맡으셨다.
프로그램, 강사, 간식, 학생들 지원, 운영 준비물은 물론 아주 사소한 준비물까지도 척척 진행을 해 주셨다.
나는 그저 교실문을 열고 닫는 것 만 했다.
나는 가끔 그때 그 선배님의 “ 내가 책임질게. “ 하는 그 말이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알았다.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고, 대단한 사랑과 책임이 아니면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그 후에도 지역 교육청에서 중요한 사업, 대회 등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주며 알려주셨다.
우리 연구회로 표창이 나왔을 때도 한 명을 추천해서 교육감 표창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회장님 본인이 아닌 자료 정리하며 고생했다며 막내인 나에게 그 영광을 주셨다.
내가 어떤 언니, 어떤 선배가 되어야 하는지 나는 발령 첫 해에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멋진 언니가 되기 위해선 단순히 사랑만이 나닌 전문성도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17년 차가 되었다.
보통 24살에 발령을 받아 62세까지 근무를 해서 35년 정도 교직에 있다고 하면 경력대로 줄을 서면 딱 중간인 셈이다.
문득 발령 초기의 시절이 생각났다. 옆에서 도와주고 함께 해 주던 선배들, 발령동기 언니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과 그때의 문화는 많이 다르다고 하지만 여전히 함께해 주는 선배, 언니가. 필요함에는 틀림없다.
11월,
나는 나를 세워준 멋진 언니들을 만났고 또 누군가에게 언니가 되어보고자 했다.
첫 발령지에서 함께 하며 도움을 주셨던 언니들과 만나 따뜻한 밥과 차를 마시며 그 시절 열정과 추억을 다시 이야기 힘을 얻었다.
그 힘으로 돌아와 이 아줌마 선생님과는 아무런 공감대가 없어 만나주지 않을 것 같은 여리고 어여쁜 후배 선생님들과 만났다.
뜬금없이 연락해서 “우리 같이 밥 먹을까요?” 하는 나의 이야기에 선뜻 반갑게 나와 준 이들이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의 외로움, 힘겨움은 우리만 아는 것이기에 힘을 주고 싶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나보다 더 열린 마음으로 함께 해준 이웃 학교 선생님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임에도 어색함 없이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선배 언니가 좀 괜찮은 사람이라면 이 길을 걸으며 조금은 든든하고 힘이 되지 않을까?
힘들 때 혼자 끙끙대지 않고 연락할 수 있는 언니,
교육과정 계획 세우다가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언니,
자료가 필요할 때 보내주세요 말할 수 있는 언니,
더 좋은 수업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 줄 수 있는 언니,
그냥 아무 때나 생각나는 언니
그런 언니가 되어주고 싶다.
나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함께 하는 이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함께 밥을 먹고 마음을 나눴던 후배가 오늘 중등 임용고시 시험에 도전했다.
멀리서 응원하며 아이들을 향해 보여주던 다정한 정성과 전문성이 꽃피우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