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통증으로 나를 다시 만난다.
그래, 나도 시간이 절실했다.
아이를 낳고 200일이 채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정확히 기억한다. 2017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날.
아직 ‘어린이’라 부르기에도 이른, 세상에 막 발을 디딘 작은 영혼이
내 곁에서 자고 있었다.
그 새벽, 나는 불현듯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지독하게 잠을 자지 않던 아이가 새벽에는 두 시간쯤 깊이 잠들곤 했다.
그 패턴이 내게는 작은 용기였다.
멀리 가지는 못했다.
혹시라도 아이가 깨면 들릴 수 있도록
아파트 주변을 맴돌며 걷고 또 뛰었다.
아이가 잠의 안정기에 접어들수록 나의 이동 반경도 넓어졌다.
우리 동네를 지나 지질연구원 앞까지 돌아오는 4km 코스,
조금 더 욕심내는 날이면 6km 코스를 뛰었다.
그리고 돌아와 아이가 아직 자고 있으면
처음부터 함께 자고 있었던 것처럼 몰래 그 옆에 누웠다.
그 시간이 내가 간절히 바라던 시간이었다.
운동을 하고, 조금 더 길어진 아이의 잠 틈에 책을 읽으며
그 시간만큼은 나를 지켰다.
복직 후에는 그 ‘시간’이 더욱 간절해졌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일어나야
운동도 하고 책도 읽으며 하루를 나답게 시작할 수 있었다.
새벽 4시 30분쯤 눈을 떠도
온전히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두 시간 반이었다.
나는 그만큼 시간이 간절하고 소중하다.
특히 새벽의 시간을 사랑한다.
“일어나 나는 다시 책상에 앉는다.
시로 향한다. 바람이 되어 풀을 일으키기 위해.
깊은 겨울. 새벽 5시 15분의 일.”
— 정은귀, 《번역가의 단어》, 22쪽
5시 15분.
공간은 멀리 흩어져 있어도, 시간은 우리를 한 줄의 빛으로 묶는다.
이 새벽, 어딘가에서 정은귀 작가님이 시를 번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실만으로 이 시간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진다.
문득 시간을 따라가 본다.
세상은 아직 깊은 잠에 잠겨 있는데
우리 집 문 앞에는 신문이 도착해 있고,
어제 주문한 형광펜이 조용히 놓여 있다.
누군가의 새벽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도 이 호사를 누린다.
“그들에게 욕망의 장소는 찰나의 순간에, 하루의 끝에,
모두가 잠든 밤에,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잠시 나타나는 일시적 틈새였다.”
— 하재영, 《지극히 나라는 통증》, 53쪽
문장이 나에게는 유난히 감격스럽게 다가온다.
나 역시 그 틈을 버텨내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나는 그 치열한 새벽의 끝에서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다.
다른 누구의 것을 욕심낸 것도 아니고,
그저 나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간절히 애쓰며 살아가는 것.
그 정도의 욕심이라면,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