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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Apr 15. 2024

글감을 찾아 떠난다.

밤 10시, 전국모 온라인모임 첫 번째 시간을 마치고 쓰다. 

기억의 끈을 따라가 본다.


언제부터였을까? 교실에서 아이들과 나누던 시간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

기억에 선명한 하나의 장면이 있다면  국어 수업시간, 흉내 내는 말을 배우던 날이었다.

배움이 느린 우리 반 아이들이 내가 흉내 내는 소리, 모습만 봐도 딱 알 수 있도록 내 안에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배우의 혼을 다해 흉내내기 맛에 심취해 있었다.


"멍멍, 멍멍" 갈라진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작고 귀여운 강아지는 아니었다.

그때 상식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우와, 선생님 진짜 개 같다."

"뭐라고? 개 같다고?"


교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웃었다. 너무 웃겨서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이는 아이가 느낀 그대로 표현했을 그것이 맞고 틀리다고 없지만 표현을 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적당한 상황에 욕과 칭찬의 애매한 경계에 놓인 표현의 타이밍이 너무나 기막혀서 아이 들어 보내고도 한참을 웃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꽉 문채 남은 수업을 진행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가 이 소리만 부분적으로 들었다면 우리 교실은 학생이 교사에게 아주 큰 욕을 한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이어 '특수학생의 문제 행동인가?'라는 장애인에 대한 불편한 시선, 

혹은 '선생님에게 욕을 하는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다니, 특수학급 교사들은 너무 불쌍해.'라는 특수교사의 동정론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스쳐 지나면 '욕'으로 다가왔을 그 언어가 아이들과 함께 그 장면을 연출하며 나란히 서있던 내게는 사실적 표현으로 다가왔다. 자세히 보지 못하면 알지 못할 언어가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 많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이 교실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우리 아이들 안에 있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주고 싶었다.


나는 그때부터 아이들의 삶에서 글감을 찾는 글감 찾기 전문가가 되어 교실에서 살게 되었다.

마음먹고 달려드니 아이들의 언어에 더 깊이 빠지게 되었다.

마치 글감 탐정처럼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나는 교실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우리 아이들의 삶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예쁜 것들이 가득해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 안에 있는 반짝임을 꺼내어 주고 싶었다. 학기 초 새로운 선생님께 나의 안이들을 소개해야 할 때, 아이의 특성, 가정환경과 함께 아이의 언어가 묶인 책 한 권을 전해주고 싶은 것이 바람이다. 


배움이 느린 아이들의 말은 더 귀 기울이고 눈을 맞춰야지만 들을 수 있는 언어가 많다.

몸이, 마음이, 눈이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도 그렇게 배웠다.

교실은 살아있는 글밭이고 나는 그 글밭에서 하나씩 주워 엮어주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아이들의 언어에서 찾던 삶의 글감이, 나에게도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의 삶을 만나며 나의 삶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배운다.

의자를 더 당겨 아이와 마주하고, 눈높이도 마음높이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교실 안에서 홀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 아이들과 마주하며 가까이에 앉게 되었다.

그저 예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시작했던 교실의 이야기 기록이

어느덧 나를 살리고, 우리 교실을 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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