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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Nov 12. 2024

내 마음의 집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도 어릴 적 살던 집이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경제 개발과 건설 붐으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겨나면서 익숙하던 동넷길이 하루가 다르게 변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재작년 서울에 갔을 때, 옛날 내가 살던 동네에 가봤다. 묵고 있던 숙소 가까운 곳이라 걸어서 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결혼해 나올 때까지 줄곧 살던 곳이다. 근처에 있던 여자대학교, 내가 다닌 중고등학교,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던 전통시장, 택시기사 아저씨들로 북적이던 꽤 유명한 기사식당까지 그대로였다. 정작 내가 살던 집만 헐리고 없었다. 그 자리엔 갓 지은 대단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기억을 되살려 친구들과 어울리던 곳들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내가 살던 두 동짜리 아파트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주변의 낡은 집들과 자주 들락거리던 문방구들이 줄지어 있던 자리까지 모두 새 아파트 차지가 된 듯했다.

그때 같이 놀던, 그리고 사춘기를 함께 지났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문득 보고 싶었다. 나는 조금 쓸쓸한 기분으로 우리 집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며, 언젠가 여기 다시 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가끔 옛집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둘째는 대학 수업 프로젝트로 우리가 살던 시카고 집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기도 했었다.

겨울이면 뒤뜰에 잔뜩 쌓인 하얀 눈 위로 작은 동물들의 발자국이 퐁퐁 찍히던 집, 몹시 더운 여름날엔 온 가족이 시원한 지하로 내려가 뒹굴대던 집, 아이들의 친구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던 집, 서울에 사는 가족과 친구들이 와서 함께 먹고 자던 집이었다. 우리 모두 아끼고 사랑하던 집이었다.

이사 나오던 날 둘째는 문틀의 작은 홈에 동전 하나를 넣어놓았다. 우리가 처음 이사 왔을 때 둘째는 희한하게도 그 작은 틈에서 동전 하나를 발견하고는 전에 살던 사람이 우리의 행운을 빌며 끼워둔 동전이라고 뛸 듯이 좋아했었다. 둘째도 새 주인의 행운을 비는 마음으로 자신이 쓰던 방 문틀의 작은 홈에 동전을 넣어두는 걸 잊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으로 집을 어루만져주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이들이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낸 집을 떠나며, 나는 그들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타지 생활에 지칠 땐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 버려 어쩌면 몹시 허전했을지도 모르는 그 마음을 말이다.

아이들이 대학으로 직장으로 모두 떠나고 나와 남편만 남아있었지만, 방학이나 휴가 때면 아이들은 어김없이 집을 찾았다. 변함없이 그대로인 제 방을 차지하곤 마치 옛날로 다시 돌아간 듯 즐거워했다.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와 살던 좁은 아파트에서 벗어나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엄마 손에 빨랫감을 맡긴 채 긴장을 풀고 흐물흐물해져도 되는 시간이었으리라.

아이들이 있는 뉴욕으로 이사 온 지도 어느덧 두 해가 다 되어간다. 가족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건 타향생활의 든든함이지만, 대신 아이들에게 고향과도 같은 집이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은 괜찮다고, 좋은 집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의 어느 순간, 늘 다니던 골목길의 냄새, 집 앞에서 친구들과 하던 놀이, 집을 떠났다가 익숙한 동넷길에 들어설 때 느끼던 안도감은 어떤 특별한 날보다도 더 진한 기억이 된다.

어릴 때 살던 집과 동네는 이제 마음속 흔적으로 남아있다. 장소나 물건이 마음으로 들어와 기억으로 남기도 하나 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모여 내가 나로 살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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