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물이 말썽이었다.
남편과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1920년대 지은 건물을 뼈대만 살려 리모델링한 집이다. 재작년 말부터 입주를 시작했으니, 작년 초 이사 온 우리는 새 집의 첫 입주자가 되었다.
새로 이사 온 도시, 새로 지은 집에서 산뜻한 기분으로 살기 시작한 지 한 달쯤 됐을까. 어느 한가롭던 오후, 욕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욕조 위 천장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물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다급해진 우리는 얼른 윗집에 알렸고, 샤워 중이던 윗집 남자는 물을 잠그고 아파트 매니저가 오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윗집 욕조와 이어진 파이프의 이음매였다. 살짝 어긋난 틈으로 물이 새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원인을 빨리 찾았고 비교적 간단한 공사긴 했지만, 새로 리모델링한 집인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매니저로부터 아파트 전 세대의 온수기를 모두 교체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과 나는 별로 불편한 줄 모르고 지냈던 반면, 더운물이 시원스레 나오지 않는다는 불평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있는 개별 온수기의 용량이 작은 탓이었다. 며칠 뒤 서울로의 여행이 예정돼 있었던 우리는, 집을 비운 사이 매니저가 들어와 공사를 진행해도 좋다는 동의를 했다. 한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전보다 체격이 큰 온수기와 거미 다리처럼 뻗은 낯선 파이프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올해 초 어느 고요한 밤이었다. 갑자기 욕실에서 뭔가 쏟아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 달려가보니, 욕조 위 지난번 공사했던 자리가 이번엔 물이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뜯겨내려와 있었고 천장과 벽을 타고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할 말을 잃고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매니저와 공사 관계자들이 나와 이 참혹한 광경을 둘러봤다. 소동의 원인은 우리 집 두 층 윗집의 욕조였다. 그 집 욕조에서 새어 나온 물이 우리 윗집 욕실 천장에 고이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쏟아져내려 우리 집 천장까지 침범했던 것이다. 우리 윗집은 며칠 집을 비우는 바람에 이 상황을 몰랐다고 한다. 우리 집, 윗집, 또 그 윗집까지 세 집이 공사에 들어갔다. 우리 집을 뺀 나머지 두 집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욕조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사 온 지 한 해밖에 안 되는 동안 뚫린 욕실 천장을 두 번이나 봐야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짜증도 나고 한편 좀 우습기도 했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 밀려오는 스트레스에 대한 자기방어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내 처지와 거리를 두면서 생긴 실낱같은 여유였는지도.
공사를 시작한 날 자정이 넘어간 새벽 시간, 젖은 내부를 말리기 위해 뚫어놓은 천장에서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쓰지 말아야 할 욕조 물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머리에 뚜껑이 있다면 이럴 때 열리는 거구나 생각하며 매니저에게 알렸다. 이미 우리 윗집에서 연락을 받아 이를 알고 있던 매니저가 곧 조치를 취하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새벽 두 시였다. 다음 날 매니저를 통해 듣기로, 욕조가 새던 윗 윗 집에 사는 사람이 매일 새벽 두 시에 목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날마다 정확히 그 시간에 왜 목욕을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공사하는 동안만이라도 왜 멈출 수 없었는지는 매우 궁금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두 달쯤 지났을까, 이번엔 더운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봄이긴 했지만 아직은 쌀쌀한 날씨, 추위에 덜덜 떨며 샤워를 하기에 이르렀다. 매니저에게 물어보니, 각 세대의 온수기를 모두 다시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바꾼 온수기로도 더운물 공급이 션찮았던 모양이다. 결국, 어마어마하게 큰 온수 탱크를 집집마다 새로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한 달 여에 걸쳐 모든 세대가 새 온수 탱크를 들이기까지 아파트 전체가 소음과 어수선함으로 들썩였다. 첫 번째 입주자가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 치고는 너무 고되고 성가셨다.
몇 달이 무사히 흘렀다. 며칠 전, 샤워를 하던 남편이 입술이 파래져서는 찬 물만 나온다고 했다. 또 무슨 일이람. 연락을 받은 매니저가 왔고, 무슨 이유에선지 두꺼비집 온수기 스위치가 내려가 있는 걸 발견했다. 전기 공급이 되지 않아 물이 데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스위치를 제자리로 돌려놓자 다행히 더운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매니저가 떠나고 나서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랐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좋은 일보다는 어렵고 복잡한 일이 더 많은 게 세상살이인 것 같다. 참고 버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괜찮아지는 날이 온다. 그렇게 삶은 그 모양새가 바뀌어 간다. 인내 후 얻게 되는 회복의 기쁨은 아예 아무 일도 없었다면 몰랐을 삶의 의미 한 자락을 선물로 남긴다.
어릴 때 택시 안에서 자주 보던 그림이 떠올랐다. 그림 속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아이 옆에 '오늘도 무사히'란 글이 쓰여 있었다. 안부를 물을 때 별일 없냐고 묻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별일 없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배워가는 중인가 보다.
아무 일도 없다고 입 내밀기 없기, 특별할 것 없는 날이라고 지루해하기 없기, 마음에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