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들과 나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한 개념의 차이를 발견했다. "엄마, 걔는 나랑 그냥 같은 반일 뿐이지 친구는 아냐." 바로 이 말이었다.
"같은 반이면 친구지." 무슨 궤변이냐는 듯 내가 대꾸하자, "클래스메이트하고 친구 하고는 다르지," 하고 맞받아치는 둘째. "같은 반 친구면 친구 아냐?" 내가 지지 않자, "같은 반이면 다 친구야?"라고 말하며 둘째는 나를 혼란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첫째가 둘째에 가세해 이 끝없는 논쟁에 가차 없이 종지부를 찍었다. "클래스메이트는 클래스메이트고 프렌드는 프렌드야."
같은 반이면 다 친구고 같은 학교 다니면 다 친구라고 생각하며 살아오던 나는 졸지에 정 헤픈 구닥다리가 됐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친구의 의미를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얼마 전 싱어송라이터이자 연출가, 극단 '학전' 대표 김민기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조문과 장례 뉴스를 보며 떠오른 기억 하나가 며칠을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친구 S가 내게 김민기의 노래 <친구>를 가르쳐주던 장면이었다. 마치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처음엔 희미하던 그 장면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선명해졌다.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김민기의 죽음과 더불어 한 시대가 사라지고 있음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아니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김민기의 <아침 이슬>은 이모부한테서 배웠다. 내가 아직 중학생일 때, 막내이모랑 결혼하고 싶어서 우리 가족에게 잘 보이려 애쓰던 당시 예비 이모부가 우리 집에 놀러 와 기타를 치며 부르던 노래. 가사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곡조와 노랫말이 왠지 가슴 뭉클하던 노래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라디오나 노래책이 아닌 누군가의 음성을 듣고 배운 셈이다.
대학 1학년 첫 동아리 MT 때 친구 S와 나는 선발대에 끼어 선배들과 함께 강촌으로 향했다. 미리 예약해 둔 민박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S는 좋아하는 노래가 있는데 내게 가르쳐주고 싶다며 한 소절씩 듣고 따라 불러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피아노도 배웠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나는 자신 있게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친구가 부르는 걸 들으니 그 음이 이 음 같고 이 음이 그 음 같아서 따라 부르기가 어려웠다. S는 더듬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그거 하나 딱딱 못 따라 하냐고 노래 사이사이에 핀잔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노래가 이상하다, 제대로 부르고 있는 거 맞냐, 의심하기 시작했고 S는 몇 년을 부른 노랜데 음을 틀릴 리가 없다, 네가 음치 아니냐고 했다. 길바닥에서 벌어진 때아닌 티격태격이었다. 봄풀냄새 가득한 부드러운 바람과 하얀 흙길이 우리를 말려주는 듯했다. 결국 후렴까지 가지도 못하고 노래 배우기는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더 흐른 어느 날, 나는 라디오에서 김민기의 <친구>를 듣게 되었다. '이런 노래였구나', 음악이 주는 감동이 S와의 기억과 더불어 파도처럼 밀려왔다.
친구에게 당장 연락해서 그때를 기억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나는 서울에 아침 해가 뜨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그만 영영 잊고 말았다.
지난주 친구 H한테서 S의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S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는, '... 나 얼마 전 네 생각 엄청 났었다...'라며 노래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너 그때 기억나? 내가 잘 못 따라 부른다고 네가 나 막 혼내고 그랬는데, 흐흐.' 놀랍게도 S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잊고 있던 기억까지 보태주었다. '강촌까지 기차 타고 갔던 거 기억나. 자리 없어서 입석으로 갔잖아. 힘들어서 남의 자리에 막 기대고 걸치고, 흐흐. 갑자기 그날이 더 생생하네. 네 헤어스타일도 생각 나...'
S의 말을 들으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던 기차가 생각났다. 그러자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맞아, 그때 기차 타고 강촌 갔지. 흔들리는 낡은 기차에 서서 가면서 선배들이랑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하며 무척 들떴었지. 게임하다 지면 벌칙으로 손목을 맞았는데, 유난히 게임도 못하고 살성도 약했던 나는 금세 손목이 벌겋게 부풀어올라 선배들이 몹시 미안해했었다. 우물이 있던 민박집 마당,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고 잠을 자던 커다란 방과 방들, 이튿날 아침 강가에 피어오르던 물안개까지 모두 떠올랐다.
그 소중한 기억들을 되찾게 해 준 친구에게 고마웠다. 그래서 간질간질하지만 이렇게 말해줬다, '내 친구가 돼줘서 고마워.'
나에게 기억이 없다면 나는 나일 수 있을까. 나를 나일 수 있게 해주는 건 나의 기억이다.
친구는 나와 같은 추억을 나누어 갖고 있는 사람, 내가 나일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다.
김민기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