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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민 Aug 13. 2021

노모(老母)의 여행은 바쁘다

"우리 공주는 앞으로 할미보다 더 많이 댕겨. 그리고 더 재밌게 살어"

할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떠난 첫 날, 베트남 다낭에서 만난 가이드님은 이런 말을 건넸다.



자식들에게 효도여행은 여행이 아니에요.
쉴 생각으로 오면 큰 코 다치십니다. 


코웃음을 쳤다. '할머니랑 해외여행 다니는 게 왜?', '별로 안 힘들 것 같은데?'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남들과 다를 것이라 자신했다. 엄마와 할머니 간의 고부갈등도 없었고, 아빠와 할머니 간의 모자갈등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손주들과 할머니가 사이가 나쁠 일이야 더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며느리를 귀찮게 하긴 싫고, 무뚝뚝한 아들과 손자는 내심 불편해 하는 할머니 덕분에 이번 여행 내내 할머니의 파트너는 재잘재잘 말 많은 내 담당이었다. 평생을 할머니 집에서 10분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에 살아온 나였기에 할머니와 호텔 방을 같이 쓰는 것 쯤이야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호텔방이 아니었다.


할머니와 나는 4일을 내리 이 자세로 다낭과 호이안을 누벼야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할머니의 넘치는 체력과 호기심. "할머니 우리도 같이 가야 돼, 그건 나중에 봐도 돼!"를 거듭 외치며 자꾸만 대열에서 이탈하는 할머니를 붙잡았다. 


우리 할머니는 길거리에 핀 꽃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 꽃의 이름은 무엇인지, 한국에는 없는 꽃인지, 향은 어떤지 시시콜콜한 것들을 모조리 궁금해했다. 길거리 상인이 파는 낯선 과일이란 과일은 다 먹어보아야 했고, 사람들이 가는 곳은 할머니도 무조건 다 가보아야 했다. 여기서도 질문, 저기서도 질문. 심지어는 노란 머리 외국인에게 다가가서 당당하게 "어디서 오셨슈?" 를 외치는 할머니였다. 


그 뒤처리는 모두 내 담당이었다. 호텔방에 와서도 내일 코스는 무엇인지, 어떤 유적지인지 내내 질문을 쏟아내는 할머니 때문에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잠든 후에는 또 어떻고. 팔순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하루종일 쉬지 않고 걷고 말한 탓이었을까. 할머니는 밤새 앓는 소리를 내며 주무셨다. '괜히 할머니와 한 방을 쓰겠다고 말했다'고 생각하며 잠에 들기 일쑤였다. 


마지막 날 쯤이었나. 나보다 두 시간은 일찍 일어나 나갈 채비를 마친 할머니는 내가 씻는 새 서리 낀 창문에 삐뚤빼뚤한 하트 하나를 그려놓으셨다. 


"우리 할머니 하트도 그려놓으셨네? 할머니는 신세대야 진짜."


"공주, 내가 귀찮게 해서 힘들지? 조금만 봐줘. 이 할미는 여기 언제 다시 올지 몰라. 그러니 자꾸 욕심만 늘어난다. 여기서만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게 할미한텐 다 처음이야. 근데 아마도 마지막이 되지 않겠어? 그러니 자꾸 생전 없던 욕심이 막 생겨. 우리 공주는 앞으로 할미보다 더 많이 댕겨.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만나고 더 재밌게 살어."


아차 싶었다. 숨기려고 숨겨보았는데도 이리저리 짜증 섞인 내 말투가 할머니한테도 닿았나보다. 하긴 산전수전 다 겪은 할매의 촉과 눈치를 어떻게 이겨 먹겠는가. 할머니도 못내 내게 미안했던 것이다.


마지막 날쯤 되어서야 슬며시 꺼내 놓은 그녀의 진심은 철 없던 내 마음을 더욱 아리게 만들었다. 내겐 방학 때마다 혼자서도 훌쩍 떠날 수 있는 해외여행이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영어를 할 수 있고, 걸음을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이 이곳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시간이 넘쳐도 마음만 있다고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의 시간은 너무도 많이 흘러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남은 시간을 더욱 바쁘게 보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베트남 여행이기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해외여행이기에 누구보다 남은 시간을 꽉꽉 채우려 노력했다. 


"할머니, 이게 냄새가 지독하다는 두리안이야. 방귀 냄새 같다던데 할머니 먹을 수 있겠어? 하나 사볼까?"

"전쟁통 때는 이거보다 더한 것도 먹었어. 하나 사봐 할매가 돈 줄게."


"할머니, 여기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래. 멋지죠?"

"유네.. 뭐? 그게 뭐여"

"아, 그냥 세계에서 최고 멋진 데라는 뜻이야! 저기서봐 할머니 사진 찍어줄게"



예상치 못한 시국으로 멈춰버린 이 시간이 참으로 야속하다. 우리의 비행기는 뜰 수 없음에도 그녀의 시간은 1년, 2년 흘러가는 중이기 때문에.. 누구에겐 짧은 1년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10년처럼 아까운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비행기가 다시 뜰 그 날까지 우리 할머니가 계속 궁금증이 많은 소녀이기를, 할머니의 다리가 지금처럼 튼튼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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