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없었다
너는 내게 무언의 시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이래도 나와 헤어져 주지 않겠느냐고. 술을 마시고 늦은 시간까지 연락이 없어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이 될까 한 데이트에서 늘 피곤한 모습을 보여도. 영혼 없는 눈빛, 공감 없이 무미건조한 대화. 우리의 대화에 더 이상 ’우리‘는 없었다. 내가 모르는 ‘너’와, 너는 궁금하지 않을 ‘나’ 각자의 이야기만 있을 뿐. 그마저도 묻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을 얘기들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우리는 신년 계획과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 공간에 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서로의 존재가 무안할 정도로, 너의 계획 속에는 내가 없었다. 장난스레 물었다. K의 신년에 나는 없는 것이냐고. 진지하게 묻는 건 이별을 앞당기는 일 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내년에도 건강하자”
K의 대답이었다.
뜻밖의 대답,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 그가 한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리고 곱씹어 보았다. 도무지 삼켜지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가자는 말도, 색다른 경험을 해 보자는 말도 아니었다. 마지못해 너의 계획 중 가장 그럴듯한 것에, 그리고 표가 나지 않을 법한 것에 나를 끼워 넣어 준 듯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미래에서 서로를 지워가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도 약속하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