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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사 Jun 24. 2024

흰 눈에 뒤덮인 무언어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시집 앞부분에 인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당신 안에서 쉬기 전까지, 우리 마음은 정처 없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시집 안에서의 ‘마음’은 가만히 멈춰있지 않는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이 당신 안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으며, 또 마음이 어떤 형태로 이동하게 되는 지는 이 시집의 시를 통해서 찾아보려고 한다.

  시에서 두드러지는 주된 이미지로, ‘눈’ 내리는 풍경과 ‘백지’가 인상적이다. ‘나’는 “꿈에 백발이 되었다(「백지상태」)”. 머리 위에 눈이 쌓일 정도로 쏟아져 내린 폭설은 ‘나’의 머릿속에서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만들고,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시를 채우는 검은 활자와는 달리 시를 읽고 떠오르는 풍경은 하얗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너무 하얀 풍경은 “가끔 눈부시”게 보인다. ‘눈부심’은 눈부심의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보이지 않아서 어디로든 갈 수 있게 된 ‘나’는 이제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모든 걸 휩쓸고도 / 모든 게 그대로인 / 모든 게 그대로인 채 / 모든 게 휩쓸려가는(「눈사태 연주」)” 그 눈부신 백지의 이야기 안에서 ‘나’가 향하는 발걸음은 계속해서 전부 지워진다. 그렇게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나’는 꿈속에서 어디든 갈 수 있으나,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 사실을 ‘백지상태’인 꿈속에서의 ‘나’는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꿈에서 깬다고 하더라도, ‘꿈’은 한순간에 ‘백지상태’로 남는 망각의 영역에 있다. ‘백지상태’ 자체가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시집에서 ‘나’와 사물의 상호작용은 “이것은 칼 / 이것은 빵(「빵의 맛」)”이라고 하는 명명과 개입을 통해 이뤄진다. 「향」에서 “향이 타는 영상 거꾸로 돌리면 모든 연기는 향에게로 수렴되고 / 향은 연기를 먹고 조금씩 비를 맞고 자라나는 줄기처럼” 자라난다. 보통의 향에서 날리는 연기가 아니라, 향이 연기를 먹고 자라는 듯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러한 장면은 “입김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공중에서 얼어붙는 소리를 / 별들의 속삭임이라고 부른(「별들의 속삭임」)” 시베리아의 야쿠트인들만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본 적 있듯이, 영상을 거꾸로 돌려보는 ‘너’와 그런 ‘너’를 지켜보는 ‘나’만 알 수 있는 세계의 모습이다. 시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의 독특한 움직임은 ‘나’에 의한 것으로도 보인다.

  「무언어」 시에서 노인은 자신의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으로 성당 먼지를 가루약처럼 타 마신다. ‘무언어’의 영화에서 ‘말이 필요 없다’는 말은, 정말 ‘말’이 필요 없다는 의미와 동시에, 말로써 다 설명되지 않는 감각이나 정서를 느낄 때도 사용한다. 노인의 믿음으로 가루약이 된 성당 ‘먼지’는 ‘성당’이라는 단어에 의해서 신적이다. ‘신’이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언어가 사라진 ‘무언어’의 세계는 신적인 세계로도 보인다. 이렇게 ‘칼’, ‘빵’, ‘먼지’라고 하는 평범한 단어들이, 『하얀 사슴 연못』 시집 안에서 ‘나’를 포함한 타인의 개입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세계조차 나타난다.

  정처 없이 떠도는 언어를 모아 ‘실수로 건드’려 보는 일. ‘나’는 실수를 모은 우연으로 ‘유리잔’에 어떤 여운을 남긴다. 앞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용문을 통해 언급한 ‘마음’은 어쩌면 ‘무언어’다. 우리는 “공중은 원래 투명한 것이지만 / 실수로 건드린 유리잔이 울리지 않으면 우린 그게 / 투명한 줄(「유리잔 영혼」)” 모른다. ‘무언어’는 흰 눈에 뒤덮인 듯 눈부시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몰랐을 뿐, 처음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시인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언어들을 불러본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요’, ‘무언어’. 그러니까, 그들의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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