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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수 Apr 25. 2023

혼불

심야괴담회에 투고했느나... 아직도 답이 없는, 재미로 보는 군대 실화

  1991년 봄. 

  내가 상병으로 진급하던 무렵에 대대적인 부대 개편이 있었다. 서울 근교에 있던 우리 독립중대는 파주의 어느 상급 부대에 편입되며 새로운 막사를 건설해야 했다. 산지에 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 으레 그렇듯이, 우리 대대도 오래된 공동묘지와 주변 산자락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세워졌다. 군부대의 특성에 맞게 큰 막사 건물과 연병장, 탄약고, 수송부, 공용화기 진지 등이 자리했고, 주변 경계는 일부 철책과 교통호를 따라 들어선 정문 위병소와 각 중대별 초소에서 담당했다.  

  공사는 일 년 가량 계속된 걸로 기억한다. 대형 기계와 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고, 병사들의 손이 필요한 작업이 많아 완공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특히 이 지역에는 묘지가 많아서 행정 절차에 따라 유골들을 처리했지만,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관이나 유골이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교통호를 파면서 관을 들어낸 자리가 한동안 네모나게 파여 있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우리도 작업이 힘들긴 했지만 요령껏 추진(군대 은어로, 인근 상점에 몰래 가서 사제 식품을 사오는 것을 말함)하여 새참도 먹으며 그리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겨울로 접어들 무렵 부대가 거의 모양새를 갖췄다. 부대 창설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리면서 별이 수도 없이 깔렸고, (별판이 붙은 수많은 1호차들과 헬기까지 동원된) 그 많은 VIP들을 맞이하느라 우리 사병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튼 창설 행사는 잘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그동안 고생하며 만든 신형 막사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시작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다.  

  그런데, 한두 달이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람 머리만한 크기에 희끄무레한 불빛덩이가 사람 키 정도의 높이에서 둥둥 떠다닌다는 것이다. 우리 소대에서도 갓 전입한 이등병 막내가 야간 경계근무를 서고 돌아와서는 2층 밖 난간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30-40미터 앞에서 하얀 빛덩이가 떠오르더니 위병소 쪽으로 둥둥 떠서 움직였다고 했다. 신입 이등병이 없는 소리를 할 리 만무했다. 불빛을 보았다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나며 소문은 삽시간에 부대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선임병들은 군기가 빠져 헛것이 보이는 거라며 후임들을 닦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불빛을 보았다는 동료들이, 적어도 우리 중대에서는, 후임병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병장 계급장을 막 단 때였다.


  사람 머리만한 희끄무레한 불빛덩이! 

  문득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후반, 우리 집은 경남 사천 해안가의 전통시장에서 옷가게를 했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재민(가명)이 할머니께서 오늘밤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 동갑이던 재민이네는, 큰 길목에 접해 있던 우리 집에서 골목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있던 작은 가게에서 선술집을 했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 정도로 이웃들이 가까이 지냈으므로, 재민이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도 동네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께 재민이 할머니께서 오늘밤 돌아가실 걸 어떻게 아셨는지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혼불이 떠서 우리 가게 지붕 밑을 지나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혼불이 빠져나간 사람은 곧 죽는다고 하셨다.


  다시 한 달여가 지나면서 부대의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500여 명의 부대원들 중 불빛을 보았다는 숫자가 거의 1/3에 달했다. 심지어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너무 무섭다며 행정반으로 내려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군인이 경계근무를 포기하는 것은 곧바로 군기교육대나 영창, 즉 군대 감옥도 감수하겠다는 의미였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대장님은 전 부대원을 연병장에 불러 놓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지금부터 귀신 이야기를 하는 병사는 곧바로 군기교육대에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내무반장이던 나는 4-5일에 한 번씩 중대 일직근무를 섰다. 내가 소속된 본부중대 행정반에서 밤을 새워 근무하며 각 소대별 불침번 근무자들을 단속하고, 야간에 한 번씩 간부 일직사관과 함께 위병소부터 외곽초소들을 한 바퀴 돌며 각 중대 근무자들이 들고 있는 순찰기록지에 확인서명을 해주는 것이 임무였다. 사실상 공동묘지터였던 우리 부대를 한 바퀴 도는 데는 대략 한 시간 가까이 걸렸고, 거리로는 약 3킬로미터 가까이 되었던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일직사관들 중 태만한 몇몇은 일직사병(일직하사라고 불렀다)에게 순찰 업무를 떠맡기고 자는 경우가 허대했다는 점이다. 


  한창 귀신 이야기가 떠돌던 와중에, 나의 첫 일직근무가 시작되었다. 

  아직 쌀쌀함이 가시지 않은 초봄의 어느 밤, 때마침 보슬비까지 내리며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소대별 불침번 근무자들을 단속하며 행정반을 지키던 나는 외곽순찰 시간이 되어 일직사관을 깨웠다. 행정반 구석에서 열심히 졸고 있던 일직사관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나더러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이런 C...!’ 아찔했다. 

  “선임하사님, 이 무서운 데를 혼자 어떻게 가요? 어서 일어나세요.(군대 언어는 다나까 문화지만, 일직근무를 설 정도의 짬이면 그냥 사회 어투를 쓰곤 했다.)” 

  몇 번 더 떼를 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임하사였던 그 중사도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였는데 아마 저도 무서워서 그랬을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일반우의(장교용 우의)를 챙겨 입고 혼자 위병소를 향해 나섰다. 이슬비는 거의 멎었지만 주변은 온통 짙은 안개로 자욱했다. 전설의 고향을 찍기에 딱 좋은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 날씨조차 엄혹한 현실이었다. 일직근무 첫날부터 말이다. 

  

위병소는 부대 정문이라 불빛도 밝고 근무자도 여러 명이어서 무서울 게 없다. 근무 상태를 확인하고 사인을 해주고는 1중대 초소로 향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혼자 산길과 다름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 길 오른편으로 부대 막사가 내려다보이는 것이 혼자인 내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대략 500미터 정도를 걸어 1중대 초소에 도착했다.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ooo” 경계병이 암구호를 요구한다.

  “ooo!” 

  내가 답을 하니 경계병은 다시, 

  “근무 중 이상 무!”하고 소리 죽여 보고한다. 

  “별 일 없어요?” 내가 묻는데 근무자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 어딨어요?”

  그러는 사이에 바로 옆 수풀에서 한 명이 나타났다.

  “일직하사님, 무서워 죽겠습니다. 저기서 자꾸 뭔가가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데... 가까이 가면 안 보이고...” 

  그 말에 나도 소름이 돋았다. 벌써부터 이러면 남은 길을 혼자 어떻게 가라고... 엊그제까지 공동묘지였던 곳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어디요? 같이 가 봅시다.” 

  나는 애써 용감한 척하며 그들이 가리킨 곳으로 플래시를 밝히며 앞장서 걷는다. 초소에서 30-4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플래시로 주변을 꼼꼼히 비추어 보며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시킨다. 

  “봤죠? 아무것도 없죠? 혹시라도 또 이상한 일이 생기면 행정반으로 전화해요.”

  사인을 해주고 2중대 초소를 향해 떠났다. 일직하사 체면을 차리느라 유유히 다음 초소로 떠났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밤길을 걸을 때, 주변이 내가 서 있는 곳보다 높은 지형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는 주변 막사가 가까이 내려다보여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들었는데, 지금 이 길은 언덕 하나를 꿰뚫어서 만든 탓에 좌우가 절벽처럼 깎여 있고(울퉁불퉁한 벽면을 연장으로 깎아내느라 몸에 밧줄을 감고 벽으로 내려가 직접 작업했던 곳이다. 엉덩이에게 혹독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위에 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슴푸레한 불빛을 받아 꼭 서 있는 사람 형상으로 보였다. 등골이 서늘했다. 쳐다보지 않으려 해도 왠지 눈은 자꾸 그 나무들로 향했다. 

  그 순간! 대여섯 발자국 앞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쏜살같이 길을 가로지르더니, 한 쌍의 불빛이 나를 향해 레이저를 쏘듯 노려보았다. 고양이였다. 휴우! 또 한번 심장이 요동치고 뒷목에서 등줄기까지 홍수가 났다.

  다행히 더 이상의 큰 문제 없이 순찰을 돌고, 마지막으로 우리 소대 후임들이 근무를 서는 공용화기 진지에 도착했다. 두 근무자들은 한쪽 어깨를 딱 붙이고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무어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계속 확인하며 무서움을 이겨내고 사방을 경계하는,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개발한 듯했다. 후임들로부터 무섭지만 별일 없었다는 말을 듣고 행정반으로 복귀했다. 막사 건물에 들어설 때는 혹시나 뭔가 따라 들어올까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장례식장이라도 다녀온 양 어깨랑 온몸을 툭툭 털어냈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한 시간 남짓의 실제 공포였지만, 그렇게 첫 일직근무는 무난히 지나갔다. 그 후로도 혼불 얘기는 여전했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은 그 혼불에 대처하는 부대원들의 자세였다. 혼불이 사람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들은 약간의 두려움과 약간의 호기심으로 혼불과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난 어느 일직근무 날!

  날씨가 조금 풀려 사회에서는 봄이라고 부르지만 군대는 아직 겨울이던 밤, 나는 또 혼자서 외곽순찰에 나선다. 그동안 몇 차례 순찰을 돌며 꽤 익숙해진 탓에 이제는 밤의 낭만과 정취도 조금씩 즐기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근무지를 한 바퀴 돌고 우리 소대 후임들이 있는 공용화기 진지로 왔는데, 일병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근무조인 상병에게 물었더니 손으로 저 위쪽을 가리키며 혼불을 잡으러 갔다고 했다. 그쪽을 바라보니 혼불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일병 녀석이 랜턴을 들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게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밤에는 눈보다 귀가 더 밝은 법이다. 발자국 소리로 거리를 확인시키며 진지에 도착한 일병에게 혼불을 잡았냐고 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한한 게 말입니다... 가만히 떠 있는 것 같은데 다가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습니다. 한 백 미터쯤 쫓아가는데 혼불이 타이어 더미 속으로 쏙 들어가지 않겠습니까(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폐타이어를 잔뜩 모아 두었었다). 그래서 요놈 잡았다 싶어 후닥닥 뛰어갔는데 슬그머니 다시 나오더니 절벽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무섭다고 난리더니 이젠 간댕이가 부었구나! 다음에 또 근무지 이탈하면 혼난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으름장을 놓고는 돌아섰다. 


  행정반으로 향하는 길목에 수송부가 있었다. 트럭들이 사열하듯 도열해 있는 그 앞을 지나가는데 한 트럭의 운전석 앞유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수송부에서 대각으로 위병소가 있었기에 나는 당연히 위병소의 전등 불빛이 운전석 유리에 반사되었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십여 걸음을 걷다가 나는 다시금 등골이 오싹해졌다! 

  운전병 출신이면 잘 알겠지만, 수송부에서는 날씨가 추운 밤에는 모든 차 앞유리에 가림막을 친다. 성에가 끼어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날씨가 조금 풀리긴 했지만 아직 가림막을 풀 때는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옆 트럭들을 보니 역시나 가림막이 쳐진 상태였다. 잔뜩 긴장한 나는, 아까 불빛이 보였던 트럭을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거기, 그 자리에는, 분명 불빛이 하나 떠 있었다. 사병들이 말하던, 어머니가 어릴 때 말씀하셨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운전석 앞유리 중간쯤에 떠 있던 불빛은 마치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천천히 나와 반대편으로 움직이더니 차 뒤로 사라졌다. 오금이 저렸다. 따라가 확인하고픈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저런 게 있긴 있었구나!’ 머리털이 곤두서고, 금방이라도 뒤에서 무언가 달려들 듯한 느낌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뛰듯이 걸어 행정반으로 돌아왔다. 후임들이 내 표정을 보고 어디 안 좋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도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부터 한 대 물었다. ‘그런 게 정말 있구나!’


  그 후로 우리 대대는 여느 부대와 다름없이 무탈하게 지냈다. 군 생활을 오래 하신 어느 인사계(요즘은 행보관이라고 한다)는, 땅을 헤집으면 한동안 기운이 뒤엉켜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하는데 몇 달 지나면 가라앉는다는 말씀을 했다. 그해 여름에 나는 제대를 했고, 일 년 후에 면회를 가서 혹시나 혼불이 보이는지 물었더니 후임들은 이제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혼불의 기억은 내 젊은 날의 가장 강렬한 추억의 하나로 자리했다.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썼지만 혹시나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당시의 우리 대대원들 중에 이 글을 읽는 동료가 있다면 기억이 새록새록 날 것이다. 군대에서는 참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지금 이 순간 군인으로 근무하는 젊은이들은 부디 전역하는 그날까지 무탈하게 생활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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