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루 Jul 10. 2022

상처

Karu's Novel A-3

  트라우마는 신기하다. 어릴 적의 나쁜 기억이 그 사람 인생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다. 주변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주기도 한다. 다만,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영향을 준다. 그 사람의 속사정을 모른다면, 분명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 화를 내거나 의아해할 것이다. 본인은 속이 타들어가겠지. 자신의 상처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몰랐다. 내가 왜 남에게 상처를 주는지, 왜 내 성격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건지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곪아버린 상처를 억지로 들춰내서 보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굳이 흉터를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민감한 문제일수록 내 안에서 썩히는 일이 더 많아진다. 주변 어른들께 자해하는 걸 들켰을 때, 취미 생활을 하면서 자해 충동을 억제해보라고 하셨다. '글쎄요, 미안합니다. 저는 그 정도로 멘탈이 강하지 않아요.' 이미 칼과 피가 주는 편안함이 몸속에 깃든 것 같았다.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아……."


  계속해서 손목을 그었다. 검붉은 피가 손목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긋던 커터칼도 피로 물들었다. 그래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 정말. 칼을 움직일수록 묘한 흥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초점 잃은 눈은 붉게 멍이 든 손목을 흐릿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끔찍한 상처도 일단 내 몸에 생기면 그 뒤로는 상처를 봐도 무덤덤해진다.


  깨끗한 거즈로 압박을 하고 약을 발랐다. 혈액으로 얼룩진 칼은 알코올로 몇 번 소독한 뒤 다시 구석에 보관했다. 팔에 붕대를 감고 손목 보호대를 착용한 뒤, 소매를 내렸다. 이러면 겉에서 봤을 때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살짝 올라가도 손목 보호대가 보이는 정도로 끝난다. 그냥 손목을 삔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또다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분명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가해자들은 멀쩡히 살아가고 있다. 어째서 상처는 피해자에게만 남는가. 왜 학교에서는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처벌하는가.




  죽고 싶었다. 그냥 장난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들었다. 학교폭력이란 건 단순히 교육으로만 배웠던 터라, 내가 겪고 있던 일들이 학교폭력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모든 게 다 끝나버린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내가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됐다.


  '친구'라는 프레임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던 놈들. 성희롱과 폭력이 그저 '장난'으로 여겨지던 학교. 소름이 돋는다. 그때 누가 내 손을 잡아줬더라면. 누군가 날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넌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께는 말씀드려봤어?'


  웃음이 나온다.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뻗은 손이었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나를 비참하게 짓밟을 줄은 몰랐다.


  "친구 잘못을 감싸줘야지, 일러바치면 되겠니?"


  당신이 그러고도 교사인가. 어째서 당신 같은 사람이 담임으로 있을 수 있는 건가. 학생에게 관심이 없는 건가? 도망치듯 전학을 오기 전까진 당신은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마저도 혈서를 쓴 뒤로 절차적인 처리 흉내만 내던 모습, 보기만 해도 역겹다. 그건 당신의 의지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명령인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학교폭력을 숨겨왔고, 눈감아왔는가. 단순히 학교의 명예가 실추되는 걸 막기 위해?


학생들한테 교육만 백날 시켜봤자 뭘 하나.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당신들이 방관하고 있는데.


  어차피 내 편은 아무 곳에도 없다.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 괜찮은 척하고 지냈다. 그게 나를 더 망가트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수동 공격성. 상대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를 못하게 되었다. 남들은 더 나를 쉽게 보고, 난 더 상처를 받게 되지만 내색하지도 못하고. 악순환의 연속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수동적 공격성이 발현된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너무 싫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간다. 내가 수동적 공격 성향이 있다는 것조차 밝히고 싶지 않다. 


  그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잃고 싶지 않았던 사람까지 떠나보냈으니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사람과는 짧은 기간 동안 함께하며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과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지내게 된다. 반 친구, 아니, 반 '애들'은 보통 전자다. 1년 보고 안 볼 사이니까. 그런데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면, 후자가 된다. 반이 바뀌었다고 연락 안 하고 사는 건 아니니까. 절친일수록, 관계는 더 가까워지고 관계의 텀은 더 길어진다.


  나는 친구를 많이 만들지 않는다. 정확히는, 아무나 붙잡고 '친구'라는 호칭을 붙이는 게 싫다. 페이스북 친구 500명, 인스타 팔로워 1000명. 이게 무슨 소용인가? 정말 내가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난 그런 사람만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 좁지만, 깊은 관계. 그게 내가 지향하는 것들이다.


  물론, 단점이 없진 않다. 친구 한 명 한 명이 굉장히 소중하기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친구를 잃게 되면 타격이 크다. 특히나 나랑 가장 친했던 친구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너'도 그렇게 잃었지. 붙잡고 싶었지 않았다. 날 버린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싶진 않아서. 나를 더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싶지 않다.

  때때로는 이게 독약이 되기도 한다.


  상대가 내게 서운한 행동을 했을 때, 바로바로 말하지 못한다. 상대에게 말하면, 분명 서운해하겠지. 아니, 아무리 상대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기분이 좋진 않을 것이다. 굳이 관계에 위태로운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소중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말을 못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네가 한 행동이 나를 서운하게 만들어.'

  '지난번에 살짝 눈치를 줬는데 계속 이러네? 날 무시하는 건가?'

  '알면서도 대놓고 쌩 까는 건가?'

  '진짜 싫다.'


  어느 순간 나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마침내, 굉장히 위험한 생각으로 변질된다.


  '네가 나한테 상처 준 만큼 너도 똑같이 당해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수동적 공격성이 드러난다. 상대는 모를 것이다. 그저 내 판단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고, 그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이런 일들을 벌이는 거니까. 네가 한 잘못을 깨달아줬으면 한다.




  「서준아, 그땐 미안했는데..」


  지현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

  .

  .

  「아니. 괜찮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한참을 뜸 들이다 답장을 보냈다.


  「어」


  이런 식이다. 학교에서 지현이가 쳤던 장난이 언제부턴가 선을 넘기 시작했다. 얘는 날 이 정도로만 보고 있는 건가. 지현이는 정말 좋다. 서로 의지하기에도 그렇고. 그런데 항상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계에 상처가 주는 행동을 자꾸 한다. 그게 너무 싫다.


   너의 행동이 가끔씩 짜증 날 때가 있다. 그게 반복되면, 너의 모든 행동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네가 싫어지게 된다. 이미 네가 선을 넘은 순간부터, 너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네가 하는 모든 것들이 짜증 나고 거슬릴 뿐이었다.


  한지현, 난 네가 싫다.


  너에게 마음을 닫은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네가 그걸 빨리 알아차리고 나에게서 떨어졌으면 했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엔 네가 그렇게 큰 실수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건 내 책임도 분명 있다. 내가 널 받아줄 수 없으니까. 더 이상 너에게 신경 쓸 틈이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난 너무 불안하다. 너까지 나를 흔들어놓으면, 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서준아."


  불러도 들은 체하지 않았다. 더 이상 네게 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너는 없는 사람이다.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 그냥 돌덩이일 뿐이다. 쓸모없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봤자 내 손해일뿐이다. 너는 애초에 살아 있던 사람이 아닌 거다. 그냥, 없는 거다.


  "문서준."


    한껏 몸을 부풀린 고슴도치 같다. 조금이라도 누군가 나에게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면 가차 없이 관계를 끊어버렸다. '적당한' 친구들을 끊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걸로 명분이 생기겠지. 적어도 넌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을 테니. 몰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다신 볼 사이가 아니니까.


  일방적인 손절은 몇 번 더 이어졌다. 조용히 톱질을 했다. 너와 나를 이어주던 실을 끊기 위해. 이미 바닥에는 가루들이 자욱했다. 마음 같아서는 현실의 너까지 썰어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신체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다. 내 손에 피 묻히기도 싫거니와, 굳이 내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사라졌으면 좋을 애들이니, 그냥 없는 취급 하는 게 훨씬 편하다.


  수동적 공격성은 관계를 파탄내기에 딱 좋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설령 내 실수라고 해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잊고 사는 게 속 편한 셈이다.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다시 남남으로 돌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