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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Jul 10. 2022

선혈

Karu's Novel A-2

  아무리 잔인한 상처라도, 내 몸에서 그걸 본 뒤로는 그저 무덤덤해질 뿐이다. 처음에 네 팔에서 자해 흉터를 봤을 땐 온몸이 떨렸다. 그 자체가 트라우마로 남았을 정도로. 그런데 이젠 아무렇지 않다. 내 팔에도 선명하게 상처가 남았으니까. 살이 잘리고,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왠지 모를 희열감까지 든다. 너와 친해지지 않았다면 너와 멀어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내가 자해를 하는 일도 없었겠지. 너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젠 측은한 마음도 든다. 너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많이 불안했구나.


  그날 이후로 너는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자퇴를 했으니까. 오히려 학교에서 너를 볼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계속 그렇게 다신 안 볼 사이로 지냈다면 좋았을 텐데, 학원 가는 길에 너를 마주쳤다. 난 너를 못 본 척하려고 했다. 넌 굳이 내 곁으로 와서 내 손을 잡았다.


  "서준아, 잠깐만."


  작게 들리던 네 목소리. 너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썼다. 너의 모든 것들이 거짓임을 안다. 분명 넌 그 정도의 침착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 잡고 있는 내 손에도 너의 떨림이 전해져 온다. 분명 너도 굉장히 불안한 상태일 것이다.


  "미안해... 내가 진심으로 잘못했어."

  "......"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작게 울었다. 넌 분명 나를 쳐냈지.


  "지난번에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던 것 같아. 진심이 아니니까... 너무 상처받지 말아 줘."

  "진심이 아니라고?"


   이제 와서?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하는 건가. 역겨웠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최소한의 예의로 네 말을 끝까지 듣기로 했다. 너와 친구였을 때는 이런 일이 자연스러웠는데, 이제는 모든 게 불편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다시 예전처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무슨 소리야?"

  "......."


  한숨이 나왔다. 먼저 절교를 선언한 친구가 이제 와서 매달린다니. 솔직한 심정은 이랬다. '네가 뭔데?' 친구 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는 분명히 있다. 넌 멋대로 나와의 관계를 끊고, 이제 와서 다시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한다. 그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여서 역겹다.


  "자기를 저버린 사람에게 얼마까지 친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난 더 이상 너에게 마음 쓰고 싶지 않아."


  인스타그램에 저격글을 올렸던 친구가 떠오른다. 그 친구의 말이 맞았다. 분명 너도 네 안에 날 둘 여유가 없었고, 날 감당하기 힘드니까 쳐낸 게 아닐지. 절교의 결과는 네가 겪는 거다. 한때 서로에게 의지했던 만큼, 힘든 것들이 있으면 함께 이겨나가고 싶었다. 너는 이기적이다. 대체 뭐 때문에 나를 한순간에 저버렸던 건가. 그리고 왜 이제 와서 나를 잡는 건가.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을 위해 지금의 감정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한때 네가 날 완전히 지워버릴까봐 불안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제는 네가 싫다. 오히려 사라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너와는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다. 후련하다.


  넌 내게 마음을 온전히 연 적이 없다. 특히 자해와 관련된 것들은 필사적으로 숨겼으니까.  너를 위해서 하는 얘기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남들에게 털어놓길 바란다. 네 안에 쌓아두다간 언젠가 크게 잘못되는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너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그러나 너는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내게 마약 같은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 받아서는 안 됐다. 한 번 빠져들어가면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자해를 처음 했던 날로 돌아가고 싶다. 절대로 난 그날 칼을 집어 들어선 안 됐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늦었다.


  처음에는 자해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처음엔 그저 핀으로 손목을 그었다. 쓰라렸다. 살갗이 빨개지고 그었던 선을 따라 피부가 부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점점 미친 듯이 팔을 그었다. 조금씩 피가 나기 시작했다. 그은 선을 따라 조금씩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칼을 꺼냈다. 그래도 겁은 있어서 섣불리 긋진 못했다. 알코올 솜으로 깨끗하게 칼을 닦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무런 판단이 서지 않았다. 칼을 조금 빼들고 내 팔에 갖다 댔다. 닿기만 해도 피가 흘렀다. 손목이 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희열이 생겼다. 심장이 계속해서 크게 요동쳤다.


  "하......."


  팔등을 보았다. 검붉은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다. 칼로 그은 부분 주위로 핏방울이 모여 있다. 칼에 베인 상처, 핏방울과 멍으로 내 팔은 이미 얼룩져있었다. 너도 분명 이런 팔을 지니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희열이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분명 예전의 나라면 이 모습을 보고 끔찍함을 가장 먼저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일까. 지금은 오히려 편안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지금도 계속 후회하고 있다. 아예 시작부터 하지 말걸. 이제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무조건 칼부터 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웃긴 모습이다. 누군가의 자해를 뜯어말리려고 했던 내가 이젠 스스로 칼을 쥐고 있는 상황이라니. 어쩔 수 없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이젠 숨기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겨울철엔 걱정 없다. 항상 긴 팔 옷을 입고 다니니까. 문제는 여름이다. 네가 왜 항상 더운 여름에도 땀을 흘리면서 가디건을 입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그냥 팔토시를 끼고 다니기로 했다. 제일 무난하고, 자연스럽다. 덥지도 않고.


  그래도 소문을 피할 순 없었다. 분명 누군가 내 팔을 봤던 것 같다.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였을까. 아무튼, 반 애들 사이에선 내가 자해를 한다는 사실이 점점 퍼져나갔다. 일부는 모른척 해줬지만, 장난기 있던 애들은 대놓고든, 슬쩍이든 내 팔을 보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진심으로 역겨워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예전에 한참 나를 괴롭혔던 애들이 있었다. 심심하면 핸드폰을 뺏는다든가, 아무 이유 없이 필통이나 공으로 내 얼굴을 때리기도 하고, 그저 내 뒤에서 험담이나 하던 애들. 이제는 학교가 다르기 때문에 볼 일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불쌍하다. 그런 것들로밖에 재미를 못 보다니. 절대로 잘살지 않길 바란다.


  거의 잊고 지냈다. 그런 놈들은 내 머릿속에 두는 것 자체가 자기 학대다. 완전히 잊고 지냈다. 그랬으면 행복했을 텐데. 너희는 내 평온을 무참하게 부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인스타그램 DM으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났다.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억 조각이 맞춰져 갔다. 난 순간 정신을 잊을 뻔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혐오감이 구역질을 일으켰다. 다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온통 뿌옇다. 손이 미친 듯이 떨린다.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슬퍼서 나오는 눈물과는 달랐다. 심장은 계속 쿵쿵거리고, 눈은 금방 충혈됐다. 불안하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 이전의 트라우마가 다시 날 괴롭혔다.


  속을 한참 게워내고 나서야 정신을 다시 차렸다. 목이 쓰리다. 소리 지르고 싶다. 대체 왜, 대체 왜 내가 너네 때문에 아직까지도 고통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방에 달려가서 커터칼부터 찾았다. 한참을 그어대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상처에서 나온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만 있다. 다시 눈물이 나왔다. 내가 너무 비참해서.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지내야만 한다는 게 너무 억울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학교는 어떻게든 가해자들을 덮으려고 했다. 내가 폭로하지 않는다면 바뀌지 않을 문제다.


  다시 SNS를 열었다.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끔찍하게 굴어댄다.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아직까지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선생님들께 얘기해봤자 소용없었다. 학교폭력에 대한 개념조차 없으셨던 걸까. 오히려 고자질하는 거냐며 나만 혼냈다. 이건 아니다.


   난 그래도 항상 밝은 얼굴로 지냈다. 어차피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거, 멀쩡해 보이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괜찮은 척을 했던 대가는 가혹했다. 이제는 스마일 마스크와 수동적 공격성으로 내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으니까. 뭐 하나 제대로 되어 가는 게 없다. 전교에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면서 날 사회적으로 매장시켰고, 난 몇 년을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지냈다. 너네 때문에.


  분명 울고 있다. 그러나 어이없이 헛웃음이 나온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 울면서 웃고 있다. 피범벅인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이 피와 눈물로 얼룩졌다. 이 정도로 사람이 피폐해질 수 있구나, 분명 잘못은 내가 한 게 아닌데 난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다.

  손가락으로 찍어서 종이에 묻혀봤다.


  제발, 살려달라고. 이제 나를 좀 놔달라고.

  혈서를 써서 SNS에 올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주변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쏟아졌다. 항상 이런 식이다. 정작 가해자들은 항상 도주한다. 주변에 남는 건 진짜로 나를 생각하고 위로해주던 친구들 뿐이다. 오히려 그런 친구들이 죄책감을 가진다. 나는 그게 싫다. 너희도 잘못이 없으니까. 내가 증오하는 건 가해자들이다. 나와 너희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려놓은.


  그런데, 원치 않던 사태까지 일어났다. 전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사태를 알고 보니, 학부모회 소속이신 분께서 내 게시글을 봤다고 한다. 덕분에 전 학교의 학생부에 이 사실이 전해졌고, 학교 측에서 조사에 나서 학교폭력 관련 처벌을 했다는 것이다.


  '쯧....'


  내심 혀를 찼다. 당사자는 이제 없다. 이미 늦었다. 정작 처벌받은 것도 주동자가 아니라 들러리였을 뿐이다. 이러니 항상 답이 없다. 굳이 더 마음 쓰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나를 찜찜하게 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사건을 축소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익명 SNS를 통해 한 편지가 날아왔다. 대충 보니 뭔가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뭘 사과하는지도 모르겠고, 누군지도 모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다. 흘깃 보고 지워버렸다. 진심으로 잘못을 깨우쳤다면, 네가 뭘 잘못했고, 최소한 네가 누구인진 밝혀야 할 게 아닌가. 귀찮다. 굳이 상대하기 싫다. 너를 떠올리는 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조금씩 나는 성숙해져 갔고, 자해를 끊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 내가 이렇게 힘들었던 때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 과거를 부정하진 않기로 했다. 나의 어두운 면일뿐이니까. 자해를 했다는 사실도 굳이 남에게 숨기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점점 더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문제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단순히 대인관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네가 떠오른다.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살아있긴 할까. 힘들 땐 어떻게 버텨가고 있을까. 너나 나나 소리 없이 절규하며 마음속으로 온갖 스트레스를 썩혀내고 있는 게 아닐까.


  멘탈이 강해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내 착각이었다.

  또다시 칼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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