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루 Jul 10. 2022

착각

Karu's Novel A-1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해?
넌 먼저 나에게 다가와줬고, 나도 네가 마음에 들었어.
거기까지만, 우리가 딱 거기까지만 친해졌다면 좋았을텐데.


  누군가의 가치관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일까?

  잠깐의 만남으로 그것이 뒤집어질거라 생각하면 오산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를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우린 천천히 친해졌다.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고, 평범한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어느새 우린 더 많은 것들을 서로 공유해갔다.

  누군가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알게 된다면, 그걸로 인해 서로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다면

  결국 알려주지 않으니만 못한 일이 되니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난 너에 대해 알고 있던 게 별로 없었다. 그러니 네가 하는 말들이 그저 힘들어서 하는 하소연으로 가볍게 여겼다. 단지 우리는 서로의 고민을 더 많이 나눴을 뿐이다. 좋았다, 우리를 더 알아가는 것은. 싫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어서.


  MBTI가 싫다. 나는 T, 너는 F. 특히 이때의 나는 지금보다 심각했다. 고민을 들어주는 것을 못하고 성급하게 해결책만 제시하는 타입. 너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게 당연하다. 그게 내 역할이니까. 난 그저 네 친구 중 하나일 뿐이다. 자주 만나는 베프도 아니고, 네 연인도 아니었으니까. 주제넘게 선 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갔다. 네 얼굴은 항상 무덤덤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친구들이 물어봐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모두를 피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나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는 항상 밝아보였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잠자리에 들었다. 넌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내가 굳이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에 들었다가도 계속 뒤척였다. 왜 편하게 잠에 들지 못하는 걸까.




  아침이 왔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너의 연락을 기다렸다. 핸드폰을 쥐고 메시지를 본 순간, 울음이 터져나왔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패닉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 앉아 울기만 했다. 다른 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네 걱정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화면에는 이런 문자가 떠 있었다.

  '정말 미안해. 나 그냥 다 내려놓고 싶어. 며칠 뒤에 보자.'


  이게 끝이 아니다. 자학과 자기혐오. 분명 좋은 징후는 아니다. 너는 나에게 계속해서 살기 싫다고 말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심각함을 못 느꼈던 게 맞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네가 이대로 사라지게 될까봐, 소중한 친구를 잃을까봐 무서웠다. 너만큼은 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나도 정신이 나갈 뻔 했지만, 너를 믿고 기다려주기로 했다.


  "16XX 콜렉트콜입니다. 상대방을 확인하세요."


  며칠 뒤, 콜렉트콜 전화가 걸려왔다. 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속으로 안도했다. 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통화는 짧게 끝내고, 병문안을 가려고 했다. 네 상황도 모르니까, 직접 마주해서 이야기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았다.


  B동 506호실, 피곤했는지 너는 자고 있었다. 전화하면서 계속 울었으니, 분명 너도 피곤했을 것이다. 아직도 눈 주위가 붉어진 티가 난다. 머리를 푸르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마치 인형같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긴장되는 상황이다. 너를 깨우는 게 맞을까? 아니면 깰 때까지 기다릴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가 손가락을 움찔댈 때마다 내 몸도 같이 움찔거렸다.


  "으으음..."

  "일어났어?"

  "....어? 와줬구나..."


  마침내 네가 일어났다. 난 아무말 없이 눈을 깜빡였다. 순간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너의 팔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 마치 네가 일부러 그은 듯한, 베인 상처가 줄무니처럼 새겨져 있었다. 하얗던 피부와 다르게 팔만 붉은 상처로 덮여 있으니 심하게 거슬렸다. 공포를 넘어 혐오감까지 들 뻔했다.


  "아..."


  너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에게 들키면 안될 것을 들켰던 것처럼. 그래도 되돌릴 수는 없다. 분명 저건 주저흔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자해를 했던 거겠지. 순간 온 몸이 떨려왔다. 네가 리스트컷 증후군**을 가지고 있었구나. 자칫 나까지 패닉이 올 뻔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네 옆에 앉았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얘기를 하기 위해.


  ** 리스트컷 증후군(wrist-cut syndrome): 자해의 일종으로, 자신의 손목을 계속해서 베는 행위




  너를 좋아해선 안 된다. 분명 우리 둘 모두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린 이미 선을 넘어버렸다. 단순히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가 어느새 이성적인 호감을 가진 사이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만약 너랑 사귀게 된다면, 친구로서의 너는 잃게 되는 것이다.


  너와 사귀게 된다면 어떤 나날을 보내게 될까? 아니, 그것보다 난 이별 후가 더 걱정이 된다.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재회는 없다. 친구로서 넘을 수 없는 선을, 연인은 넘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을 그렇게 넘어버린다면 다시 친구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다시 지금처럼 서로의 고민만을 나누는 사이로 내려올 수 있을까? 난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너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친구인지 썸인지, 분명 우리는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그 오묘한 단계에 접어가긴 했다. 네 팔에 있던 상처도 어느새 말끔히 사라졌다. 흉터가 남긴 했지만 거의 보이지 않으니.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분명 행복하긴 하지만, 분명 어딘가 덜컥 겁이 난다. 난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느끼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난 널 끌어올려주고 싶었다. 내가 정말 힘들 때 네가 손을 내밀어줬던 것처럼, 나도 너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진 않았다. 분명 우리는 많이 친해졌다. 서로에게 간섭할 수 있는 부분도 늘었고, 서로의 행동과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사이에 이르렀다. 그러나 불가침의 영역도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넌, 자해에 대해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길 바랐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의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마치 날 저격하고 쓴 듯한 말이다.


    사랑을 하려면 우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고,
    연애를 하고 싶으면 자신이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지.
    자해를 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자학과 자기혐오를 일삼는 사람을 사랑하고 연애감정을 느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을 바로잡아야 연애를 하든 말든 하는 게 아닌가?


  짜증난다. 그래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다 맞는 말이니까. 오히려 지금의 내가 너무 초라해보였다. 저 아이가 보기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다 탈진하는 꼴이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가족이라면, 연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특수한 상황도 아니다. 그저 친구, 잘해봐야 서로 관심이 있는 친구일 뿐이니까.


  '난 너에게 어떤 사람이야?'


  언젠가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상태였다. 또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고 응급실에 입원했으니까. 한동안 네 팔에 상처가 없길래, 난 네가 자해를 완전히 끊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넌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계속해서 네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조금씩, 꾸준히, 철저하게. 그러다 마침내 쌓인 것들이 터진 거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해?'


  너에게 자해와 관련된 얘기를 하면 항상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도 분명 그게 싫었던 것일 테지. 최근에서야 알았다. 누군가가 너에게 자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그 이후로는 그 사람을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걸. 왜 그런진 모른다. 분명 그것도 너의 트라우마라고 여겨서일까. 최근 들어 네가 나에게도 차갑게 대하는 게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난 어떻게든 네가 널 망가뜨리는 걸 멈추고 싶었다.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다.




  드디어 퇴원을 했다. 병원 앞에서 널 기다렸다. 네가 불렀으니까. 그런데 오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없는 감정 꾸며내는 것도 이제 지쳤어. 미안해, 거짓말해서."


  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그동안 너랑 지내서 재밌었어. 근데 우리 다시 남남으로 지내자. 모르는 사이로."

  "무슨 말이야?"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믿기 싫었다. 분명 넌 나를 쳐내려고 하는 거다.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아예 나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거겠지. 인정하기 싫었다. 너와 떨어지기 싫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서 매달렸다. 내가 보기에도 추해보였다.


  "왜 울어? 지나간 건 지나간 거야.

   ... 난 끝났는데? 손 댄다고 해서 되는 상황이 있고 아닌 상황이 있고.

   ... 괜히 질질 끄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너는 나에게 비수같은 말들만 쏟아냈다. 네가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내 마음에 아프게 박혔다. 모른다. 네가 그냥 너를 방어하기 위해 그러는지, 내가 너에게 다시는 마음 쓰지 않도록 일부러 말을 차갑게 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나에게 정이 떨어져서 그러는지 모른다. 확실한 건, 나는 친구를 잃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친구를.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울었다. 시간을 되돌렸으면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호감이 점점 혐오감으로 물들어간다. 아니야, 아닐 거야. 분명 네가 착각한 거겠지. 네가 말실수한 거겠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억지로 부정해봤자 나만 힘든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했다. 천천히 친해져서 내 일부가 되고, 사라진 거니까. 난 결국 무너져내렸다.


  넌 날 끌어올려주고,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너를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