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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pr 08. 2024

다시 채워 넣었다는 게 널 대신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영화 <로봇 드림> 리뷰


최근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극장에서 다시 봤다. 혼자 영화 보는 걸 좋아하고, 두 번째 보는 영화는 더욱 혼자 보려는 편이지만 에에올만큼은 그럴 수가 없어서 친구를 데려갔다. 에에올의 1부는 왠지 사람을 외롭게 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세금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에블린 앞으로 거대한 다중우주 세계관과 익숙한 빌런이 등장하고, 에블린은 그 사이로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질문의 진실을 알게 된다. 에블린은 자신이 웨이먼드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보다 멋진 삶을 살았을 거라는 걸 알게 되며 현실에 더욱 실망하게 된다. 에에올 1부에서 에블린을 따라가자면 어느새 관객 역시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이 순간으로. 절대 잊으면 안 돼"라는 알파웨이먼드의 당부를 잊어버리고 불행한 현실 속에서 혼란스럽고 외롭게 남게 된다.


물론 에에올이 좋은 영화인 이유는 그런 혼란스러움과 외로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 답을 주기 때문이다. 1부만 잘 넘어가면 외로움도 금세 사라진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친구를 부른 건 정말로 한 순간을 함께 견디고, 이 좋은 영화를 같이 보고 싶어서였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내부에 비어있는 공간이고 아무도 그걸 없애줄 수는 없다고 믿지만 가끔은 누군가가 구멍을 잠시 메워 수는 있는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며칠 뒤 만나게 된 <로봇 드림>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로봇 드림>은 외로움의 구멍을 메워준 이들과 그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였다. 만남과 추억은 짧고, 이별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된 관계를 개와 로봇을 이용해 묘사했다. 대사는 한 줄도 나오지 않기에  모든 인물의 선택과 감정을 표정과 행동으로 짐작해야 했는데도 어쩐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9월처럼 6월에도 다시 만나


뉴욕에서 외롭게 살던 개는 어느 날 로봇을 주문했다. 개에게 로봇은 외로움을 메워줄 존재로 충분했고, 로봇은 마냥 즐거웠다. 둘은 "Do you remember"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에 맞춰 함께 춤을 췄고,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함께 봤고, 바다로 함께 놀러 갔다. 영원할 거 같았던 하루하루의 즐거움이 거기서 끝날 줄을 몰랐다.


물놀이를 하고 일광욕까지 마친 개와 로봇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로봇은 누운 상태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개는 로봇을 옮기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뒤 홀로 집으로 돌아갔다. 개는 집에 돌아가서도 로봇 걱정에 밤을 지새웠고, 다음날 아침 곧바로 공구함과 로봇 수리 책을 들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해수욕장은 이미 폐장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는 갖은 노력을 하며 로봇을 되찾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해수욕장이 다시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이별 앞에서 개와 로봇은 절망하기보다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을 믿었다. 개는 냉장고에 쪽지를 붙이며 해수욕장이 다시 열리자마자 로봇을 찾으러 갈 것이라고 다짐했고, 로봇은 당연하다는 듯 개의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외로움이 그리움을 희석한다


개와 로봇이 처음 떨어졌을 때 그들이 느낀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개는 상대를 떠올리게 하는 다른 사람만 봐도 심장이 덜컥거렸고, 로봇은 함께 본 영화를 떠올리며 개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때로는 개가 이미 다른 상대를 찾아 자신을 잊은 건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다. 둘은 상대의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리움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변하면서 그리움도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리움 대신 외로움이 커졌고 그 공간을 다른 존재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개에게는 함께 취미를 즐길만한 상대가 나타났고, 로봇에게는 새가 둥지를 틀면서 밤낮으로 함께 하는 상대가 생겨났다. 물론 이들과의 관계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둘 모두 상대들과 이별해야 했지만 외로움을 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둘 다 이 사실을 의식적으로 깨우친 건 아니기에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있긴 했다.


하지만 결국 개와 로봇은 서로가 가장 간절했던 순간, 가장 외로워진 순간에 서로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로봇은 고물상으로 옮겨져 전원이 꺼졌고, 개는 해수욕장이 개장하던 날 로봇을 찾으러 갔지만 로봇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이 순간 나타난 건 상대를 다시 만나는 기적이 아닌 외로움을 채워주는 다른 존재였다. 로봇은 자신을 수리해 준 라스칼 덕에 다시 눈을 떴다. 개는 새로운 친구 로봇을 구매해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가장 외로워진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난 상대 앞에서는 그리움이 졌다.



다시 채워 넣었다는 게 널 대신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로봇 드림>의 정점은 영화 마지막에 등장했다. 로봇은 우연히 길을 가던 개와 그의 새로운 상대를 창문너머로 보게 됐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상대를 보며 로봇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건 상상에 그쳤다. 개와 자신 둘 다에게 새로운 상대가 있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간절했던 순간 나의 외로움을 채워준 상대를, 다른 상대가 그립다는 이유만으로 떠날 수 있을까?


로봇은 뛰어가서 개를 붙잡는 대신 개와 자신이 함께 춤을 췄던 노래를 틀었다. 개는 멀리서 노래가 들리자 로봇과 함께 짝을 맞춰 췄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로봇 역시 함께 추던 춤을 췄다. 그 순간 둘은 가장 행복한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춤이 끝나자 개와 로봇은 지금의 상대에게로 돌아갔다. 여기서 개와 로봇이 새로운 동반자를 만남으로써 외로움을 메웠지만 그게 서로를 '대신'했다는 의미는 아니란 게 보였다. 만약 대신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갈아 끼울 수 있다면 로봇과 개는 서로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대 역시 그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순간 함께 있는 존재 역시 예전의 서로처럼 외로움을 채워넣어 준 동반자이기에 함부로 떠날 없는 거다.


그리고 그건 개와 로봇 서로에게도 메시지를 준다. 서로에게서 멀어진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다른 사람을 옆에 뒀다는 것이 널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움은 희석되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이 채워 넣어줬지만 그게 우리의 추억과 어쩔 수 없는 이별에 어떠한 유감도 없다는 뜻은 아닌 거다. 단지 그 모든 것을 안고도 다른 상대와 함께 할 수 있다.



언제나 같은 춤과 노래를 반복할 수는 없는 법


로봇에게 개는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고 개에게 로봇은 가장 즐거운 춤이었다. 하지만 기나긴 인생에서 언제나 같은 춤과 노래만 반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로봇은 개가 아닌 새로운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틀기 시작했고, 개 역시 새로운 친구 로봇과 새로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박자만 맞다면 모든 노래에는 다른 춤을 붙일 수 있고, 모든 춤에도 다른 노래를 붙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노래나 춤을 붙인다고 하여 그 원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새롭게 붙인 노래나 춤이 가짜인 것도 아니다.


관계 역시 그렇다. 타이밍이라 불리는 박자가 들어맞는다면 비어있는 상대의 춤과 노래를 채워 넣어줄 수 있고, 그 관계가 끝난다고 해도 새롭게 찾아 올 춤과 노래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렇다고 해서 함께 맞춰온 노래와 춤들이 의미가 없다거나, 사라진다거나, 그립지 않은 건 아니란 거다.



Do you remember?


잔인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로봇 드림>이 퍽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대감을 주기 때문이다. 애틋한 추억을 품고도 다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헤어졌어도 그게 사라진 건 아니라는 사실이 말 한마디 없이 마음에 와닿는다.


끝으로 로봇과 개가 함께 듣고 춤췄던 September의 노래 가사를 소개한다.


Do you remember the 21st night of September?
9월의 21번째 밤을 기억하나요?

Love was changin' the mind of pretenders
사랑은 위선자들의 마음을 바꾸고

While chasin' the clouds away
구름도 거둬들이고 있었죠

Our hearts were ringin'
우리 가슴은 뛰고 있었죠

In the key that our souls were singin'
우리의 영혼이 부르던 노래에서

As we danced in the night, remember
우리가 밤에 춤을 출 때

How the stars stole the night away,
별들이 어둠을 거두어 가던 걸 기억하나요?

oh, yeah yeah yeah
Hey, hey, hey
Ba-dee ya,
say, do you remember?
기억하시나요?

Ba-dee ya, dancin' in September
9월의 춤을

Ba-dee ya, never was a cloudy day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죠

(중략)

My thoughts are with you
난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해요

Holdin' hands with your heart to see you
마음으로 손을 잡고 당신을 봐요

Only blue talk and love, remember
우울한 대화와 사랑, 기억하세요.

How we knew love was here to stay
우리 곁에 이 사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Now, December found the love
지금은 12월이고, 우리는

that we shared in September
9월부터 나눠 온 사랑을 찾았죠.

Only blue talk and love, remember
우울한 대화와 사랑, 기억하세요.

The true love we share today
오늘 우리가 나눈 진정한 사랑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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