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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Oct 30. 2023

'만약'이 없는 꿈과 사랑이기에

영화 <라라랜드> 리뷰

몇 해 전 곧 가을이 오려던 밤, 커피 한 잔을 들고 분위기 좋은 산책로를 걸으며 친구랑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워낙에 좋은 곳이었기에 커플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이 사실을 친구에게 전해주니 친구는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영상통화라도 해줄까...?"

감정 없이 사실을 전달한 건데도 마음씨 좋은 친구는 내가 처량해 보일까 봐 걱정이 됐나 보다.

나는 웃으며 "야! 지금 너랑 나랑 영상통화하면 우리 사귀어야 돼. 날씨가 정말 그렇다니까?"라고 답해줬다.

이런 생각을 한 게 나만은 아니었는지, SNS에도 한창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기 좋은 날씨니 함부로 누군가와 같이 걸으면 안 된다'는 글을 공유하고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람을 함부로 사랑에 빠지게 하는 선선한 가을날이 왔다. 여름과 가을 중 <라라랜드>를 보기 좋은 계절은 언제인가는 논쟁거리지만, 가을밤 루프탑에서 <라라랜드>를 보는 걸 마다할 사람은 없을 거다. 선선한 날씨, 밤하늘이 보이는 옥상, 재즈가 있고 꿈이 있고 사랑이 있는 영화 <라라랜드>. 사랑에 빠지기 가장 좋은 이 순간, <라라랜드>를 만나보았다.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겠어요?

사람들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던 오프닝은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오히려 약하게 느껴졌다. 이후 뻔하게 흘러가는 내용들을 생각해 보면 오프닝씬은 '우리는 달라요'라고 일단 소리치는 몸부림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이 장면을 좋아했는지는 알 거 같았다. 꽉 막힌 도로에서 해방감을 느끼게 하고, <라라랜드>라는 이야기로 들어가는 데 몰입감을 높여주는 장면이었다. 오프닝신 마지막, 등장인물들이 자동차 문을 닫는 순간에 맞춰 영화 타이틀이 뜨는 것은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부터 이런 꿈의 이야기가 시작되니 당신 역시 잘 탑승하라는 안내 같았다.


이후의 내용은 클리셰의 연속이었다. 미아와 셉의 만남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따라갔다. "너는 그때 그 싸가지?" "넌 그때 그 재수탱이?"라고 종종 놀림받는 뻔한 여자 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만남이었다. 어느 시점까지 클리셰를 따라갔냐고 물으면 답할 수 없을 만큼 예상 그대로였다. 미아가 남자친구와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셉을 만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셉이 미아를 위해 내키지 않는 밴드에 들어갈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간에 서로 다른 이성에게 흔들리는 장면이 없었다는 점은 클리셰를 피한 거 같았다. 하지만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겠는가? 클리셰는 뻔하고 모두가 예상할 수 있기에 게으르게 느껴지는 서사기도 하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살아남은 서사기도 하다. 두 연인이 모두가 상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캐릭터들에게 더욱 편하게 몰입을 할 수 있다. 특히 <라라랜드>라면 엔딩의 파급력을 위해서라도 관객들을 속일 수 있는 '클리셰'를 많이 활용해야 했을 거다.



"전력을 다 해야 해"

영화 내내 쌓아온 클리셰는 결국 거의 끝에 다다라 깨져 버린다. 파리로 가야 하는 미아와 재즈 밴드 활동을 해야 하는 셉은 "평생 사랑할게"라는 말과 함께 분기점을 맞이한다. 지금은 헤어져도 여느 로맨스 영화가 그렇듯 둘은 재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5년 후' 자막과 함께 다시 등장한 미아는 셉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라라랜드>를 보기 좋은 계절을 논하는 문제만큼이나 <라라랜드>의 결말이 좋냐 안 좋냐는 큰 논쟁거리다. 어떤 사람들은 관객들의 기대를 완전히 깨어버린 엔딩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엔딩 덕분에 <라라랜드>가 여러 사람들의 인생영화가 된 거라고 말한다. 논란의 결말을 직접 본 소감은 '좋은데!'였다.


두 주인공이 꿈과 사랑을 동시에 거머쥐었다던가, 둘 중 하나가 희생해서 한 사람만 꿈을 이루고 사랑은 둘 다 이뤘다면 영화의 메시지가 흐려졌을 거 같다. <라라랜드>는 영화 내내 꿈과 사랑을 두고 저울질을 한다. 반드시 엔딩에는 꿈과 사랑 중 하나만 남아야 하며, 미아와 셉은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둘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애초에 셉과 미아의 갈등이 고조된 이유가 무엇인가? 셉이 사랑을 지키고자 본인의 꿈을 현실과 타협해 밴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당시 미아는 꿈을 위해 1인극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확실히 말한다. 한 사람은 꿈을 택하고 한 사람은 사랑을 택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꿈과 사랑을 둘 다 동시에 거머쥐는 것 역시 선택지에 없다. 둘은 그걸 모두 얻을 만큼 성장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말은 두 사람 다 꿈을 택하거나 두 사람 다 사랑을 택하는 것만 남는다.


다시 분기점으로 돌아가보면, 셉은 "평생 사랑할게" 이전에 파리로 갈지 말지 고민하는 미아에게 "전력을 다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대사가 나온 시점에서 <라라랜드>의 엔딩은 확실해졌다. 러닝타임 대부분 두 사람이 보여준 사랑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셉과 미아는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자신의 전력을 내기 위해서는 서로를 놓아줄 수밖에 없다. '대충 사랑하는' 일 따위 서로에게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건 꿈을 대할 때도 그렇다. "전력을 다 해야 한다"는 대사는 두 사람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아는 이 순간 꿈을 택했고, 미아와 운명공동체인 셉 또한 자동으로 꿈을 택하게 된다.


두 사람의 선택은 낭만적이다. 헤어졌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사랑이라서가 아니라 헤어졌기 때문에 사랑의 무게가 실감 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꿈과 사랑 중 꿈을 택하는 건 그만큼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라라랜드>를 보고 나니 나의 전력을 못 내게 할 만큼 큰 의미의 사람이라 두고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거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결정이 <라라랜드>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끝맺음'보다 슬픈 '만약에'

<라라랜드>를 강렬한 영화로 만든 건 연인의 이별이 아니라 'IF신'이었다. 이별쯤이야 로맨스 영화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헤어진 연인이 우연히 다시 만나는 건 '클리셰'다. 하지만 IF신은 미아와 셉의 사랑을 응원한 관객들이 모든 걸 되돌려 놓으라고 호소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라라랜드>는 밤하늘에서 춤을 추는 신 등 우스을만큼 '환상'을 표현한 장면들을 많이 보여줬는데 이 IF신이야말로 그 모든 '환상'의 대미를 장식했다.


미아를 발견한 셉은 피아노에 앉아 함께 불렀던 노래를 연주한다. 셉의 연주와 함께 시작되는 게 IF신이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만약 그때 우리가...'라는 부질없는 연극이 막을 올린다. 이 장면을 더욱 슬프게 만드는 건 두 사람의 태도다. 둘은 재회는 아주 조용히 이뤄졌다. 바로 옆자리인 미아의 남편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했다. 이 두 사람은 현실을 바꿀 만큼 이별이 슬프거나 후회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만약 그런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다면 둘 다 무슨 행동이든 취했을 거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고요한 재회를 즐긴다. 되돌아가고 싶어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만약을 그려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셉과 미아는 꿈을 이뤘다. 사랑했던 과거도 좋았다. 그러니 당연한 듯 마음속 한 구석에 '만약'을 그려볼 여지가 생겼다. 꼭 후회하고 절박한 사람만 가정법을 쓰는 건 아니다. 둘 중 무언가를 버려야 했던 모든 사람들은 가정법을 써 본다. 셉과 미아가 쓰는 가정법은 고백에 가깝다.

'돌아갈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때는 꿈보다 너를 사랑할게'

두 사람의 조용한 재회는 꿈이 있는 한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히 2순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니 IF신은 <라라랜드>의 다른 장면들이 그랬듯 '환상'에 불가하다.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일 따위 없다

<라라랜드>는 꿈과 사랑을 저울질하지만 두 개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꿈도 사랑도 만약은 없기에 전력은 다해야 한다는 거다. 둘 중 무엇을 택하든 결국 최선을 다해야지만 결과가 나오고, 결과가 있다면 택하지 않은 쪽에 대한 후회가 덜 하다. 셉과 미아가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랑까지 버려가며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을 이뤘기 때문에 사랑을 버린 과거가 아주 절절하지 않은 거다.


IF신의 교훈 또한 강렬하다. IF신은 말 그대로 '만약'이다. 과거의 일을 두고 '만약'을 쓰는 건 그 일이 없다는 말과 같다. IF신은 '되돌아가서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순간 따위 절대로 오지 않는다'라는 걸 확실히 보여준다. 사랑과 꿈 중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다시 가질 수 없다. 늘 '꿈'을 고민하는 셔젤 감독이 보여주는 잔인한 사실이다.


<라라랜드>는 씁쓸하지만 새드엔딩은 아니다. 적어도 두 주인공이 무언가는 하나씩 거머쥐었고, 그다지 파괴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간의 위로도 함께 얹어준 덕에 가을밤 보기에 더욱 좋은 영화였다. 괜히 '인생영화'가 아니고, 괜히 7년째 네이버 영화 검색에 '상영 중'을 달고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환상적인 '라라랜드'가 펼쳐지고 있을 거다. 그리고 영화를 본 모두는 어렴풋이 알게 될 거다. 사랑에 빠지기 좋은 가을날은 꿈에도 빠지기 좋은 가을날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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