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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Nov 16. 2021

신체를 설명하는 방식과 <사이보그가 되다>

매끄러운 편집, 균열을 일으키는 '몸'들

매끄러운 편집, 균열을 일으키는 '몸'들

"신체가 단순히 뼈, 근육인가요?"


"신체가 단순히 뼈, 근육인가요?" 몸에 대한 글을 적겠다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나는 이 질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게, 나는 왜 몸을 단순히 진화의 결과물로 이해했을까? 단세포로부터 진화된 유기체, 사지와 이목구비 그리고 오장육부와 206개의 뼈들. 왜 몸을 그렇게 정의해버렸을까. 이 질문 앞에서 몸에 대한 나의 상상이 얼마나 협소했는지 깨달았다.


펼쳐 놓았던 협소한 상상력을 들여다보며 계속 질문의 답을 고민했다. 신체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세포의 합이 아니란 걸 알겠다. 근데 그러면 신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러다 <사이보그가 되다>가 생각났다. 신체에 대한 나의 상상을 넓혀 놓았던(다시 좁아졌지만) 그 책. "신체가 단순히 뼈, 근육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당당히 답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책이다. 동시에 '장애를 가진 신체'의 잠재성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가지고 질문에 답하려 한다.



"교정되지 않는 몸"


장애인의 몸에도 종류가 있다. 장애를 정체화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교정되거나 치료되지 않고 장애를 정체화 하는 일’이었다. 책에는 인공 와우 대신 농인의 정체성을 선택한 사례가 나온다. 수술을 거부하고 들리지 않는 신체를 자아로 받아들인 이가 있다. 장애를 완벽히 고치는 약이 나와도 장애를 유지하겠다고 소리치는 장애인 운동가도 등장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장애에서 어차피 자유로울 수 없으니 포기한 거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나 또한 작지만 '교정되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다. 지금이야 별 일이 아니지만 내가 자랐던 시기에는 여전히 왼손잡이는 교정대상이었다. 학습지 선생님은 오른손으로 글을 쓰도록 내 연필에 보조기를 달아 줬고, 학교 선생님들은 혼을 내기도 했다. 주변인들은 나를 정상성에 편입시키려 했지만 나는 결국 왼손잡이가 되길 선택했다. 지금도 일상에 불편함이 있지만 오른손잡이가 되거나 되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다. 나의 몸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교정되지 않은 모든 왼손잡이는 고집이 세다는 말에 신빙성을 더하는 사람이 나다.


비정상성의 신체 요소가 소멸되거나 치료되어야만 하는가? 당당히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교정되지 않는 몸'에 대한 작은 경험이 이에 근거가 된다. 문제는 사회에 이러한 몸들을 어떻게 존재시킬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교정되지 않는 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질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힌트 1을 얻는다. 신체는 자아와 연결되며 그건 때로 사회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매끄러운 편집, 균열을 일으키는 '몸'들"


사회가 원하지 않는 신체는 자연스레 '요구하는 몸'이 된다. 나는 교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온전히 존재할 자리를 만들어 달라. 사회는 이 요구를 무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몸들을 숨기기 바쁘다. 숨기는 방식은 쉽고 단순하다. 그들이 존재할 수 없도록 편의를 봐주지 않는 거다. 그리고 천명한다. 세상을 보아라, 이토록 매끄럽고 행복하게 흘러가는 것을. 모두가 온전히 존재한다.


세상이 장애인의 존재를 '편집'하고 매끄럽게 연결하는 모습에서 나는 <자전거 도둑>을 떠올렸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자전거 도둑> 말고 영화 <자전거 도둑>을 말한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자전거 도둑>의 작가는 할리우드식 편집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할리우드는 기승전결, 3ACT, 닫힌 해피엔딩을 일종의 공식으로 사용했다. 작가는 그러한 공식이 인간의 좌절을 가리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존하는 고통을 덮고 가상의 행복만을 대중들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미디어이론이나 대중문화 이론에서는 이러한 편집이 종종 비판받았다. 물 흐르는 듯한 편집 속에서 대중들은 비판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미디어가 제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는 주장도 있다.


영화 속 매끄러운 편집이 실존하는 인간의 고통을 덮듯이, 사회의 매끄러움은 장애인의 존재를 덮는다. 그리곤 영화가 대중들의 비판적 생각을 막은 거처럼 사회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과 연대할 생각을 막는다. 그런데 애초에 세상에 매끄럽게 연결되는 게 있기는 한가? 장애인들은 편집을 견뎌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몸'이 된다. 장애인들은 틈새를 드러내며 사회가 더 나은 방식의 기술과 환경을 구현할 것을 말한다.


힌트 2는 여기서 등장한다. 신체는 사회를 바꾸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아니오. 신체는 단순히 뼈, 근육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이보그가 되다>를 짧게 되돌아보는 것으로 답은 선명해졌다. 신체는 단순히 뼈, 근육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체는 무엇인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1초에 380만 개씩 세포가 교체되고, 60조의 세포가 살아가는 신체는 무엇으로 확장되는가?


설명은 단순하다. 신체는 '담론의 장'이다. 우리의 신체는 우리 자신을 설명한다.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설명한다. 한 사람의 성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자아가 자라고 영혼이 안주하는 신체는 '나는 누구인가'의 가시적인 답이 된다. 동시에 신체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어떤 신체가 사회에서 환영받는지, 사회에서 탈락된 신체는 어디로 가는지 그런 고민들도 모두 '몸'에서 시작된다. 비정상성의 몸들은 가장 뜨거운 '담론의 장'이 되어 사회를 더 넓게 만들려 한다.


그래서 질문의 대답은 "아니오. 신체는 단순히 뼈, 근육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세포 외부로 확장되어 우리 자신과 사회를 정의할 담론이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좀 기분이 나아진다. 그런데 기껏 정답을 찾았더니 또 질문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여성의 신체는 어떻게 설명돼야 하는가?" 교수님,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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