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화된 전략으로 가을에 피는 채도가 높은 꽃
가을과 겨울에는 피는 꽃은 그 종류가 적어서 내가 좋아하는 꽃을 고를 수가 없다. 그나마 늦가을에 피기 시작하는 동백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꽃들은 봄에 핀다. 아파트 화단에서 피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라일락과 다발로 사서 집에 꽂아 놓는 프리지어, 그리고 꽃망울을 꺾어다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집에서 피워보는 목련을 좋아한다.
그러니, 이 가을에 꽃에 대해 쓰라고 하니, 나는 막막해서 이런 문장을 만들고야 말았다.
"산에 핀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아래에서 발견된 시체......"
이 문장도 만들어서 버렸다가 다시 주워와서 써보는 것이다.
이 막막함을 날려버리는 질문 하나
"왜 가을에 꽃이 피는가?"
봄과 여름은 꽃이 피고 자라기 좋으며, 곤충들도 활발히 일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과실수인 사과꽃, 복숭아꽃, 배꽃, 자두꽃, 귤꽃, 포도꽃이 핀다. 이모작을 하여 짧은 시기에 꽃을 피우는 메밀이 봄에도 꽃을 피우고 가을에도 꽃을 피운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가을에 피는 꽃은 열매 맺기 위한 꽃이 아닌 것이다.
가을에 피는 꽃은 나름의 생존 전략을 가지고 가을에 핀다. 그 전략이 나와 유사한 면이 있어 나는 그 전략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다.
가을에 피는 꽃은 봄과 여름을 보내는 동안 충분한 영양분을 확보한다. 그리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꽃을 피워 씨앗을 맺고 성숙시킬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다.
나는 MBTI 끝자리는 j, 나는 준비하고 움직이는 유형이다. 나는 MBTI가 모두 거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그 준비가 대문자 J(대표적으로 울 남편 되시겠다.)가 보기에는 미흡하고, P가 보기에는 준비하는 형태의 '조금' 준비하는 소문자 j인 것이다. 여행을 간다고 하면 j인 나는 어디로, 언제, 어디에서 묵을지만 정한다. 대략적인 큰 동선만 나온다면 그냥 가는 편인 것이다. 비교하여 대문자 J인 남편은 하루의 동선도 정하고, 그 동선 안에 있는 맛집과 간식집도 찾아놓고, 일정 내에서 쇼핑하는 시간도 배분하는 것이다. 그러니 남편이 내게 일정을 짜라고 하면 나는 일자 별로 큰 그림을 그리고 넘긴다. 그러면 남편이 한숨을 쉬며 세부 일정을 채우는 거다.
좀 부족하긴 하지만 가을꽃처럼 나도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경쟁을 회피한다.
봄과 여름에는 많은 곤충들이 활동해서 유리하기도 하지만, 많은 꽃이 피기 때문에 곤충을 유도하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한다. 가을에 피는 꽃은 이 경쟁을 회피하고 힘을 모아 가을에 피어서 가을에만 활동하는 특정 곤충을 유혹한다. 예를 들어 박각시나방은 밤에 피는 꽃인 달맞이꽃이나 코스모스, 국화를 탐하고, 털이 많아 추위에 강하여 늦가을까지 활동하는 호박벌도 국화를 좋아하며, 꽃등에도 국화와 미나리 같은 가을꽃과 함께 활동한다. 그래서 가을꽃은 어두운 곳에서도 눈에 잘 띄는 흰색, 노랑, 보라 등의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경쟁을 회피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딸이 퇴근하고 공부하는 나를 보며,
"엄마, 평생 공부해야 한다더니 진짜였어?"
라고 했다. 비록 밖에서는 쓸 수 없는 자격이지만 이 회사 안에서, 이 영역에서는 나름 전문가다. 봄과 여름에 피는 꽃들처럼 경쟁하지 않는 가을의 영역에 있다.
다른 방법을 찾는다.
가을꽃에 대해 쓰기 위해 꽃을 훑어보던 내가 특정한 꽃이 아닌, 그들의 생존 전략을 글을 소재로 삼았듯, 늦가을에 피는 동백은 다른 방법을 찾는다. 대부분의 꽃이 수분의 방법으로 곤충을 택하는 충매화(蟲媒花)인데, 동백은 조매화(鳥媒花)이다. 조매화는 새를 수분의 매개로 사용하는 것이다. 동백의 붉은색은 동박새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고, 많은 꿀을 준비하여 새가 자주 찾아오도록 유인한다.
나는 막히는 지름길을 쉽게 포기하지만, 결국 도착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니, 나는 때로 늦게 도착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이것저것 시도하고 나서야 출발하는 사람인 것이다.
꽃으로 태어났으면 나는 아마 동백일 것이 분명하다.
동백이 어떻게 지는지 아는가?
꽃잎이 흩날리는 벚꽃, 시든 꽃잎 하나 툭 떨구는 목련과는 달리 꽃 한 송이가 시들지 않은 채 통째로 떨어진다.
이 동백이 떨어지는 것처럼 내 글이 생생하게 살아서 당신 마음속으로 통째로 떨어졌으면 좋겠다.
피는 시기를 기다려
제 몸을 붉게 단장하고
꿀을 가득 안고
한 송이 살아서 떨어지는
그 어여쁜 동백을 기다린다.
나는 늦가을부터 피는 동백을,
나를 닮은 붉은 꽃을,
가을의 길에 서서
내 그리운 친구처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