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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Apr 08. 2022

공정하다는 착각 그 후에 대하여


1.

무려 100년 전의 일본 소설에서 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면 놀랄 일인가, 슬퍼할 일인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에 등장하는 서로 닮은 듯 대비되는 두 명의 인물, 주인공 나가이 다이스케의 아버지 나가이 도쿠, 그리고 다이스케의 친구 히라오카는 각각 전근대와 근대가 혼재하는 지금의 우리나라를 표상하는 듯하다. 자기 노력으로 일궈낸 부를 안정적으로 대물림하고자 아들을 정략결혼 시키려는 나가이, 자신의 의지를 사회에 실현시키는 데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증하려는 치열한 생활인 히라오카, 두 사람 모두 팔자 좋은 에고이스트 지식인인 주인공 다이스케를 아니꼽고 한심하게 여기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이뤄낸 부의 크기, 사회에 기여한 바, 돈을 버는 능력 같은 척도로 사람의 쓸모와 가치를 판단하는데, 이는 현대 사회가 개인을 평가하고 위치를 분배하는 일련의 메커니즘과 전혀 다르지 않다.


"젊은 사람이 그런 실패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실성과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의 결정에 비추어볼 때,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을 게다."

... 이런 과거의 경험을 갖고 있고, 그 경험에서 조금도 벗어날 생각이 없는 나가이는 무엇이든 성실성과 열정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이런 나가이의 편향된 신념은 지금 우리가 '꼰대'라 일컫는 세대의 사고방식과 유사하다. 노력으로 역경을 딛고 뭔가를 성취하는 서사를 숭배하면서도, 종족 보존의 본능처럼 자기가 이뤄낸 모든 걸 자녀에게 세습하고 싶어한다. 어떻게든 자녀에게 남들보다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려 애쓰면서도, 불공정이란 나태한 자들의 변명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내적 모순은 더 강한 확증편향에 덮여 해소되지 못하고, 정신적 삶이나 삶의 내재성 같은 근대적 개념은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아니다. 이것이 바로 100년 후 대한민국에 대치동 학원가와 입시전쟁을 만들어낸 주범이다.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에서 인격이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 역설하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데, 억압과 신경증 같은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자기 몸통만한 책가방을 매고 새벽부터 등원하는 수많은 학생들의 텅 빈 눈동자에서 병적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편 주인공의 친구 히라오카는 그야말로 실속 있게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사회생활에서 배우는 처세의 교훈'을 자랑스레 여기는 성실한 생활인이다. 처신을 잘못해 궁핍한 상황이 되었지만, 자신의 삶의 방식에 자부심을 갖고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모더니스트다. 자신을 풋내기로 여기는 히라오카에게 "음악은 고상한 경험이고, 빵과 물은 저열한 경험"이라며 정신적 삶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다이스케에게 히라오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 언제까지고 그런 세계에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지."

그의 말에는 부(富)에 대한 일종의 저주 같은 감정이 실려 있는 것처럼 들렸다.


소위 '금수저'를 증오하는 우리 세대의 외침과 다를 것이 없다. '밥벌이 문제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는 고귀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주인공을 비난하는 이 말에는 사회가 기본적으로 불공정하다는 문제의식, 기회의 균등을 중요시하는 근대적 가치관이 내포되어 있다. 자기 노력과 능력으로 성취한 것만이 정당하며,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차등은 공정한 것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무능한 샌님이 부모 돈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믿는 것,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마이클 영이나 센델이 말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다. 센델은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는 불공정한 상태를 공정하다 착각하게 만들고, 그 착각은 혐오를 낳는다고 말한다. 엘리트 계급이 자신들의 사회적 성공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고, 저학력 노동자들의 실패를 그들의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나가이 같은 기성세대가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리 없지 않느냐는 것이 젊은 세대의 한탄인데, 그들이 생각하는 '공정' 역시 차별과 혐오를 내포한 불공정이라는 것을 센델은 지적한다. 배달노동자에게 "못 배워서 배달이나 한다"고 조롱한 어느 고대생의 추태는 한 개인의 특수한 악덕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우리 모두의 민낯이다. 유력 정치인 자녀의 부정입학이나 채용비리에 분노하는 것은 권력이 공정성을 침해하였기 때문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나보다 못난 놈이 부모 빽으로 파이를 더 가져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이다. 나보다 못났으면 나보다 낮은 대학, 낮은 연봉, 좁은 집을 감수하는 게 당연하고 공정하다 믿기 때문이다. 성실히 노력했다면 정의로운 것인가. 장시간 앉아서 잘 외우고 문제 잘 푸는 능력이 윤리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더 나쁜 것은 사실 다들 다이스케와 같은 삶을 내심 부러워하고 선망한다는 사실이다. 실은 노력 따위 하지 않고도 남의 위에 있고 싶어한다. 이것을 인정하면 여태껏 노력과 성취로 지탱해 온 자존감이 무너지기 때문에, 공정성 어쩌고를 무기삼아 그들을 비난하며 도덕적 우월감이라도 가져보는 것이 히라오카와 우리 세대가 공유하는 정서적 코어다. 우리는 권력의 '주변인'으로 존재하지만 늘 권력을 열망하고, 권력이 할퀸 자존감을 '소수자'를 멸시하며 채운다.


더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우리는 모두 공부를 잘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고, 그래야 주류 집단의 구성원이 될 수 있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권력을 갖고 상위 계층이 되는 걸 정당하다고 믿고, 시험 점수에 따라 부와 권력이 차등 분배되는 것을 '공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련의 정신적/이데올로기적 토대 위에 나고 자란다. "너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커서 배달이나 한다"라든지, "쟤 휴먼시아 사는 애니까 같이 놀지 마라"는 말을 수치심 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많아서, 아이들조차 태어나자마자 연대와 존중 대신 경쟁, 차별, 혐오를 학습하며 자라는 환경이다. 사람의 절대적인 존엄성이 아니라 학력과 재력, 사는 곳, 부모의 직업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고, 그 상대적인 위치로 자신과 타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입시와 취업이라는 허들은 사람의 다양한 가능성과 재능을 배려하지 않고, 획일적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카스트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이런 게 한국에선 상식이고, 사회 전반을 관통하고 지배하는 주류적 의식이다. 인간은 모두 존귀하며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준엄한 명제가 한낱 대학, 직장, 아파트 따위로 칼같이 나뉘는, 대통령 당선자가 "육체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이라는 혐오 발언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바람직한 인간상인가? 소세키는 자조적 결말을 통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역동적인 생활세계로부터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예술과 지식을 음미하며 유유자적 지내던 그도 결국 본가의 경제적 지원이 끊기자 생계를 위해 저임금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데, 이것은 소위 '연결'이라는 감각을 망각한 개인의 몰락이다. 모든 사람은 사회와 연결되어 있고, 그 기저에는 노동이 있다. 누군가의 노동이 결국 내 삶을 지탱하며, 이것에 책임 없는 사람이란 정말이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다이스케 같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모든 실존을 멸절시킨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인식론적 특권을 지켜내려 애쓰지만, 그 모든 정신적 고고함도 결국 남의 돈과 노동이라는 토대에 의존하는 상부구조의 일부였음을 깨닫는 데는 아마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이스케는 속되거나 천박한 사람이 아니지만, 딛고 선 땅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려 영락한다. 그의 선택을 로맨틱하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후속작 <문>에서 묘사된 그 후의 이야기를 보면 사랑이 곧 구원은 아님었음을 알 수 있다.



2.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공동체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는-실상 이전 저작들의 동어반복에 가까운 내용임에도, 센델의 책이 널리 읽히며 능력주의에 관한 비판적 담론이 형성되고, 상기하였듯 우리가 대면한 공정성에 관한 이슈들과 맞물려 대중 차원에서도 활발한 문제제기와 논의가 생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능력주의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노력이 100%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 소위 '수저론'으로 대표되는 세습 구조에 더 관심이 있고, 공정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며 담론의 지형도 얕고 조야하다. 기껏해야 이준석의 혐오 발언을 비난할 때 인용하는 정도이다.


우리는 다들 무한한 기회의 균등이 보장되는 리버럴한 사회에서의 플랫한 능력지상주의가 잘 작동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건물주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노력과 성실을 중요시하지만 코인과 주식으로 불로소득을 추구하고, 저학력 노동자는 낮고 천한 사람이라 타자화하면서도 식생활은 전적으로 배달에 의존한다. 조금 전 로켓배송으로 생수랑 생필품 주문해놓고, "딸배가 죽는건 자연사"라는 댓글을 익명으로 달며 낄낄대고 있다. 아무도 노동에 가치를 두지 않고 하찮고 미련한 것으로 여긴다. 로베르 카스텔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행위자들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어 개인주의와 독립성을 서로 조화롭게 결합시킬 수 있는 부류'와 '개인성을 사회적 결속의 결핍과 안전성의 부재로 체험하기 때문에 이 개인성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있는 부류'로 양분되고 있는데, 카스텔의 표현으로 '결핍 개인'이라고 하는 후자는 지속적으로 도태되며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고된 육체 노동은 모두 그들의 몫이며, 그래서 사회구조는 지속적으로 결핍 개인들을 양산한다. 그들이 일하다 다치든 죽든 나랑은 딱히 상관이 없다. 당장 내 집값을 올려주고 세금을 줄여줄 대통령 후보를 뽑는다. 그러면서 달리 대안이 없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불평등한 착취가 지탱하는 풍요롭고 안락한 삶들,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최선이라는, 상상력이 거세된 믿음체계, 요컨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곧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민주노총이 선릉역 배달노동자 사고를 구조적 문제로 규정하고, 배달노동자 공제조합 설립을 추진한다고 한다. 이러한 주체화 현상 이면에는 단순한 노동/자본 갈등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좀 더 복잡하고 뿌리깊은 이데올로기 체계가 작동하고 있다.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경쟁에서 이기고, 상승하고 성취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 그런 삶의 상들이 일련의 사회적 준거가 되고,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건강하고 추구해야 할 모습으로 여겨진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선 이것이 주체적인 삶이고 곧 근대성이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런 개인화 과정은 수많은 이데올로기 장치들의 '호명'에 의해 예속된 주체들이 재생산되는 것, 즉 예속적 주체화다. 요컨대 이데올로기는 생활세계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이 곧 주체를 구성한다. 주체란 이데올로기라는 유물론적 구조의 재생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성이라는 것도 하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이며, 그것은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처럼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기만하기 위한 관념적 무엇이 아니라, 국가기구, 학교, 언론, 대중매체, 법과 제도 같은 생활세계 속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장치들을 통해 작동하는 체계다. 이 장치들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호명'을 통해 개인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지배한다. 행위자가 스스로 근대적이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 곧 계급 지배를 강화하고 재생산하게 된다. 아무런 강제성 없이 자본주의는 계속 돌아가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혐오와 차별, 선망과 탐욕을 동력으로 영속한다. 장치를 한 두개 갈아치우고 덧붙이는 것으로 이 구조를 전복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능력주의를 타파하고 모든 노동자들을 구분없이 존엄하게 대우하고 인정하자"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센델의 주장은 깊은 통찰력과 편향되지 않은 시선으로 사회 현상을 면밀히 분석하여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해내는 성과가 무색할만큼 별다른 시사성이 없는 결론이다. 센델의 주장대로  노동 자체에 존엄과 가치를 부여하고, 고학력 노동과 단순노동 간의 정치적 위계를 해체하고, 배달 노동자나 공사장 인부라도 판사, 의사와 다름 없는 정치적 권리, 즉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자본과 노동의 갈등적 관계는 그대로이다. 게다가 학력 구분 없이 노동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자는 주장은 오만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 인정의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그 가치를 주고 또 빼앗을 권력을 갖고 있는가? 기득권을 쥐고 있는 엘리트 지식인 집단의 자기반성과 성찰에 의거해 시혜적으로 주어지는 인정이라면, 그런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선 권리와 존엄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될까? 과연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 공공의 논의를 통해 노동의 존엄성을 높여준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과정을 통해 가능할 것인지 나는 센델의 책을 여러 권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


능력주의는 그야말로 지배적 척도, 현대인의 주체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 그 자체다. 센델에게 그것은 다른 어떤 주의(~ism)의 주창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양이지만, 음악학자 니콜라스 쿡의 말대로 "이데올로기는 투명한 믿음들의 체계로서, 스스로를 '원래 모습'이라고 제시"하며, "대안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기 때문에 쉽게 구축될 수 없다. 다른 무엇으로 덮어 없애거나 물들일 수 있는 간단한 악덕이 아닌 것이다. 공화주의, 공동선, 사회통합 같은 건 진보의 간이역 혹은 결과물이지 진보의 방법이 아니다. 바스카의 '설명적 비판'이론처럼 정확한 비판을 제공하고 담론을 생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엘리트 석학들이 모여 진보에 관한 이야기를 열심히 나눈다고 현장에서 지금도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이 내일부터 안전해지지는 않는다. 급진적 변혁보단 점진적 진보가 안전하지 않느냐고? 고층건물 공사현장에 나가보거나, 교차로를 가로지르는 배달 오토바이에 탑승해보고 나서 안전을 논하길 바란다. 사람이 지금도 죽어나간다. 서구 사회는 어쩐지 몰라도 우리는 지금 시간이 없다. 느긋할 수가 없다.



3.

1번을 뽑든 2번을 뽑든 세상이 그대로인 것은 이데올로기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며, 이데올로기가 호명한 우리의 주체성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우리는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좋든싫든 연결되어 있지만 현대사회의 생명정치는 늘 이러한 점을 망각하게 만든다. 감시와 처벌이 아닌 주체성과 자아실현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감각을 마비시킨다. 내 삶을 충실히 살다 보면 어느새 괴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안락한 소파에 앉아 TV로만 접하는 타인의 고통은 머나먼 이야기이고, 자기 삶을 돌아보면 수치심은커녕 자부심만 가득하다. 체제 속에서 열심히 살아온 게 무슨 죄란 말인가? 그러니 센델을 천 번 읽어도 답이 없다. 자잘한 불공정은 투표로 고치면 되고, 나는 정의로운 시민이니까.


그러나 당장 답이 없다고 생각하기를 멈추어선 안된다. 편리함에 취해 타인의 고통을 잊어서도 안 된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해방의 열쇠는 아이스테시스의 복권이다. 우리는 다시 존재론으로 돌아가 마비된 감각을 일깨워야 한다. 예술로든 철학으로든 문학으로든, 아니면 설득이든 싸움이든 조롱이든 다른 무엇으로든간에, 감각-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 수치심이라는 감각, 연결성에 대한 감각, 나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객체들에 대한, 존재에 대한 뜨거운 감각을 되살려내야 한다. 그 감각으로부터 나의 미학을, 나의 미학으로부터 나의 윤리를, 나의 윤리로부터 나의 정치를 탄생시켜야 한다. 그 감각으로 촘촘한 이데올로기 바깥을 보고, 그 미학으로 느끼고, 그 윤리로 판단하고, 그 정치로 마침내 부숴버려야 한다. 송곳이 되어 찌르고, 찔려서 피를 봐야 한다. 내 피만큼 장애인의, 여성의, 소말리아 난민의, 배달노동자의 피도 붉다. 모든 공정 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큰 틀에서 뭔가 바뀌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여기가 로도스다"라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이 지금 당장 그리고 끊임 없이 급진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나를 무디게 만드는 모든 것들과 매 순간 싸우고, 공정하다는 착각에 휩싸인 사람들의 마비된 감각을 후벼파야 한다. 나를 이미 정해진 어떤 주체로 만드는 호명에 저항해야 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끝없는 생성과 변용의 '-되기(dvenir)'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 여성-되기, 아이-되기, 노동자-되기, 나아가 모든 사람-되기를 통해 배치의 산물인 주체 너머의 존재를 사유해야 한다. 권력으로 고착화된 배치 속에선 다른 무엇도 '될' 수 없고, 그러면 다른 누구의 고통과 죽음에도 무뎌지고 무책임해진다. 그래서 우리에겐 능력이 필요하다. 직업 능력이나 시험 공부 같은 지배적 질서가 정해놓은 톱니바퀴의 능력이 아닌, 감각하고 사유하고 해방하는 존재의 능력, 안락한 삶과 생명권력이 잊게 만든 그 잠재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 내일도 내년도 다음 세대도 아닌, 바로 지금 당장 말이다.


4.

글을 마치며, 루시드 폴의 노래 <사람이었네>를 곱씹어 본다. 이 긴 글로 구구절절 이야기하고자 했던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감각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펫, 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안에 갇힌, 열네 살, 하루 1달러를 버는

난 푸른 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 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공장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 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어느 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 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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