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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Jul 21. 2023

정치적 교사, 애도의 정치


학생에 의한 초등 교사 폭행 사건과 학부모 갑질에 의한 초임 교사 자살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교육 방법론을 성토하며 피폐해진 교사생활을 한탄하는 한 현직 교사의 글이 인터넷 공론장을 달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들이라, 현업에서는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분위기다. 분노한 교사들이 전례 없이 한 데 뭉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중의 여론도 격한데, 위력 있는 소위 ‘갑’의 횡포와 반성 없는 가해자의 안하무인이라는 요소가 직업군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조적 문제를 자꾸만 개인의 일탈로 몰아가는 교육계와 학교, 일부 언론의 물타기가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으며, 망자를 애도하는 수많은 인파와 화환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교권 붕괴’라는 화두가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교권이란 뭔가. 요컨대 교사가 학생을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련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그러나 권리가 곧 권위는 아닐진대, 빈번해진 권리 침해의 이면에는 기존 권위의 붕괴가 있다. 즉 더 이상 사람들이 예전만큼 교사를 공경하고 존중하지 않게 되면서-그 원인이 이제까지의 업보든, 새로운 세대의 도덕적 퇴행이든간에- 권위로 지탱되던 권리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하늘 같은 스승의 은혜라는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사람들의 에토스 일반이 재편되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반작용, 거부 반응 같은 것이다. 혹자는 학생인권조례 탓을 한다. 중등교육에 한정한다면 전혀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나, 초등교육의 현장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비약이 있다. 애초에 교육 포퓰리즘의 산물이라 현장에서 생각만큼 강력하게 작용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학생의 권리가 증진되었다고 반대급부로 추락할 교권이면 애초에 그것은 권리도 무엇도 아니었다고 봐야 옳다.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를 희생해서 특정 영역에 몰아줄 수 있는 배급제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오히려 해방이라면 해방이지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니다. 위력과 공포로 유지되던 질서와 시스템, 폭력이 일상이던 야만의 시대에 향수를 갖는 것은 문재인이 싫다고 전두환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늘 현재를 충실히 살며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하기에, 우리가 딛고 선 곳을 로도스로 삼고 여기서 뛰어야만 한다. 문제라면 권위가 무너진 교사들에게 안전망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로 보면 권위의 전복처럼 보여도 실상은 권위의 축만 교사에서 학부모에게로 이동하였을 뿐이고, 새로이 학부모가 된 현 세대는 그것을 휘두르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무엇보다 정말로 문제시해야 하는 부분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제까지 교사들이 겪고 있었던 심각한 일상적 불안정성에 그 누구도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저 연금제도나 방학, 빠른 퇴근 따위를 피상적으로 부러워할 뿐, 노동자로서의 교사가 얼마나 규범적으로 억압받고 있는지, 매 순간 그들을 ‘을’로 호명하는 이데올로기 앞에 얼마나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는지, 얼마만큼의 사생활 침해를 겪고 있는지, 이러한 일련의 현실에 아무도 관심이 없고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교권 문제의 핵심이다. 자신이 택한 직업이니 불행도 행복도 개인의 몫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 교사가 겪는 모든 고통을 개인의 취사선택의 결과값으로 정당화한다. 말의, 언어의, 언표의 수행성이란 실로 무서운 것이다. ‘누칼협’이라는 흉포한 신자유주의적 표현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을 생명정치적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이 시대에, 살기 편한 줄만 알았던 교사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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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같은 노동자들도 교사를 딱히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철밥통’이라는 오래된 혐오 표현이 그 강력한 배제의 의지를 반증한다. 불성실한 일부 교사 탓을 하기엔,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으로서의 교사에 대해 거의 적대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교사가 뭔가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면 대부분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며, ‘방학’을 누린다는 사실만으로 부러움을 사고, 그들이 매일 겪는 다양한 곤란들은 치열한 산업현장의 그것에 비하면 하찮은 애로사항 정도로 여겨지곤 한다. 이러한 일련의 적대적 파토스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신자유주의적 세태와 맞물려 교사 집단을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소외시켜 버렸다. 교권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의 업보라기엔 지금 교사들의 삶이 지나치게 피폐해져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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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당면하고 있는 불안정성에 대중이 최초로 주목하기 시작한 지금 이 때가 바로 교사 집단이 정치적 주체로 ‘출현’할 때라고 생각한다. 고인의 원통함을 정치적 수단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적인 교사 집단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전교조를 생각하는데,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양당제 정당정치와 결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 적대감과 억압에 대해 “우리도 사람이다”라고 외치고 분노하는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교사들이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로서, ‘애도의 정치’를 행하길 주문한다. 늘 무기력하게 체념한 채 한 발 물러나 있던 원자화된 개인들을 한 데 모으고 투쟁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자각, 운이 좋아 이제까지 피할 수 있었지만 내일이라도 내가, 옆 반 동료가, 다른 학교의 동기가 똑같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자각이 아닌가. 회복해야 할 것은 과거의 권위가 아니라 그저 보편적 인권이다. 교권 이전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와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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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투쟁의 방식은 죽창이나 화염병이 아닌 애도다. 바로 내일, 오로지 애도하기 위해 사람들이 한 데 모일 것이다. 모이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강력하게 정치적으로 의미화한다.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애도에 그치지 않고, 애도를 통해 그 죽음에 책임 있는 모든 억압적 권력과 부조리한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이 집결하고 연대할 것이다. 모여서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며 투쟁할 것이다. 나는 그 힘을 믿는다. 거대하고 끈끈한 연대를 기대하며, 피해자를 추모하며, 오늘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소망하며,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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