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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흙표범 Nov 13. 2023

유튜브 따라쟁이 남편

(부제 : 손기술 좋은 사람과 같이 사는 애환)

"에어컨은 도대체 언제 쓸 수 있는 거야?

 폭염에 일주일 넘게 이게 뭔 짓이야?

 내가 처음부터 업자에게 맡기자고 했지?

그럼 두 시간이면 끝났을 것을!!!"


"유튜브에서도 이렇게 하던데... 에어컨 가스가 없나?"




에코가 손재주가 좋다는 것은 연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세차장에 필요한 물품은 직접 수리하고,

만들기까지 하는 것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었으니까.

결혼 후 화장실 전등을 갈고, 고장 난 주방후드를 셀프 수리해서 멀끔하게 만든 것을 보며,

'이게 결혼의 장점인가' 느끼기도 했다.


혼자 살 때는 집에서 뭐라도 고장 나면,

고장 난 그 상태 그대로 살면서 버티기에 들어갔지만,

이제는 에코만 부르면 다 해결이 되니까.


결혼 몇 달 후, 드디어 전세계약 만료로

내 예전 자취방이자 첫 신혼집을 떠났다.

시골에 위치한 18평 복도식 아파트였는데,

저녁시간이면 복도에 온갖 이국적인 음식냄새가 가득하고,

내 왼쪽집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세 가족이,

오른쪽집은 베트남 청년들이 살던 글로벌 아파트였다.


예전집과 몇 평 차이 나지는 않지만, 도심에 있고,

주변 이웃도 모두 한국인이고,  

더군다나 '내 집'에서 산다는 행복을 느낀 이사 첫날,

에코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셀프인테리어를 좀 해볼까?

 화장실 타일도 깨져있고 수리할 것도 좀 있네.  

 말만 해~ 내가 다 할 테니"


이사한 집은 에코에게 레고모형 같았다.

뭘 먼저 고칠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그는, 물 만난 고기였다.




여름철이라, 가장 시급한 건 에어컨 설치였다.

그는 유튜브 영상을 몇 개 찾아보더니,

에어컨 셀프설치에자신감이 넘쳤다.

이사 전. 에코가 떼어놓은 벽걸이 에어컨을

이사업체는 딱 옮겨만 주었기에,  

에어컨과 부속품들이 새집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너무 전문적으로 보이는 그 기계들을 보며, 나는 약간의 회유작업에 들어갔다.


"에어컨 설치 한 번도 안 해봤잖아.

전문업체에 연락은 한번 해보자.

가격은 얼마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여름이라 또 며칠 대기 해야 하는 건 아닌지"


20만 원이고, 작업은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예약이 밀려서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업체 얘기를  듣고,

나는 에코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손재주 좋았던 레퍼런스를 한번 믿고 맡겨보기로.

사실 내 일당도 20만 원이 안되는데, 2시간에 20만 원을 쓰는 것도 아깝긴 했다. 


뭔가에 호기롭게 도전하는 남편을 지지해 주는 훈훈함은 잠시 뿐,

에어컨 설치를 시작하자마자 에코의 동공은 흔들렸고,

나의 독기도 스멀스멀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벽에 구멍을 내는 데만 2일이 걸렸다.

에어컨을 벽에 걸려면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오후 내내 무선 전동드라이버 소리를 들었지만

뚫리지 않았고,

결국엔 유튜브를 보며 파악한 장비를 관리실에서

빌려 오고서야 겨우 구멍을 뚫었다.


용접을 하는 데는 5일이 걸렸다.

우리 집 거실에는 스탠드형 배관이 매립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사용할 벽결이형 배관과는 사이즈가 달랐다.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함께 동공이 흔들려 버렸다.

결국엔 사이즈가 다른 배관을 연결하기 위해 쇼핑몰에서 용접봉을 사서,

집에서 용접까지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것도 퇴근 후 해가 진 저녁에.


에어컨 가스를 넣는데도 2일이 걸렸다.

일주일 만에 드디어 에어컨을 벽에 걸 수 있었다.

드디어 끝났구나 싶었고, 함께 세리머니를 하며,

전원을 켰는데 미지근한 바람만 나오다니...

폭염에 일주일을 버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 나 더운 거 못 참는 거 알아 몰라?

  5월부터 에어컨 켜고 살았던 내가,

  이 폭염에 일주일 넘게 뭔 고생이야!!!!! "


아무리 화를 내도, 시원한 바람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에어컨에 넣는 가스를 주문하고,

다음날 가스통이 배달된 후에야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있었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2시간에 20만 원을 받는 이유는 있었다.

호기로운 도전의 결과,

장비 구입비로만 20만 원 넘게 들었고,

폭염, 열대야에도 9일간 에어컨 없이 살았으며,

말끔하지 못한 마무리로

에어컨 배관들은 난잡하고 정신없기 그지없다.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이 에어컨 설치업체를 지적할 때마다

  셀프로 설치했다고 설명하면, 다들 숙연해지곤 한다)




에어컨 사건 후,

유튜브 금지령, 셀프 작업 금지령이 내려졌다.


에코는 한 달 넘게 내 눈치를 본 후,

슬금슬금 또 금이 간 화장실 타일 교체작업을

준비 중인것 같다.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타일 관련 유튜브를 보는 소리가 문밖으로도 들리는데,

이번엔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업체를 부르면 하루면 될 텐데....

 

결혼 몇 달 후 나는 알아버렸다.

그는 뭐든지 자기가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었고,

가끔은 그 의욕과다로 인해 너무나 힘들다는 사실을...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변하지 않았다.

손재주가 좋고 직접 수리하는데 거리낌 없다는 걸

연애할 때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파생될 줄을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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