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흙표범 Dec 25. 2023

결혼 후 첫 생일, 집을 나간 남편

(부제 : 언제나 실용적일 필요는 없다)

좀 있으면 내 생일이잖아, 나 받고 싶은 선물 있어”

뭔데?”

다이아몬드 귀걸이



연애 5개월 만에 결혼을 했기에,

에코와 처음 맞는 내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혼할 때 ‘나는 티파니 반지 하나면 돼’라며

유일한 예물로 3백만원대 반지를 받았고,

그때는 나도 이걸로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갑자기 속물로 변해버린 걸까.

결혼하고 처음 맞는 내 생일에는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정말 받고 싶었다.




스무 살 때 이런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귀걸이를 하면 1.5배 예뻐지고,

머리를 기르면 10배 예뻐지고,

살을 빼면 100배 예뻐진다고.

머리는 언제나 긴 상태였고, 살을 뺄 수는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귀걸이 었다.


그때부터 귀걸이는 내 필수템이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예전부터 애용했던 귀걸이를 착용했는데,  

갑자기 왜 그런지.

수년간 찼던 큐빅 귀걸이들이 허접하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결혼하며 예물로 받은 다이아 귀걸이를

매일 착붙템으로 하고 다니는 사람들만 왜 이리 눈에 띄는 건지...


결혼할 때 예물은 반지 하나면 된다고 쿨하게 얘기했지만,

예물세트를 받는 사람들이 내심 부러웠고,

연애 기간 동안 선물 하나 못 받았다는 보상심리까지 더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생일 한 달 전부터

‘다이아 귀걸이’ 세뇌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에코는 내 마음이 진심이란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생일날 아침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겨줬다.

발 볼이 넓은 나를 위해, 볼 넓이 4E 사이즈 운동화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내가 얘기한 다이아 귀걸이는?”

“선물을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그건 너무 비싸잖아.

결혼 기념일 같이 다음번 특별한 날에 사줄게”

결혼 후 맞는 첫 생일날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가장 서러운 날이었다.




코딱지 만한 집은 꽁냥 거릴 때는 좋아도,

상대방이 꼴 보기 싫을 때는 최악의 집이 된다.

저녁에 현관문을 열자마자 먼저 퇴근한 에코가 보였다.

그래서 나는 바로 옷방으로 직행했고,

쇼핑백에 여벌의 옷과 화장품을 싸기 시작했다.

큰 쇼핑백을 들고 현관에 다시 서있는 나를 보고 에코는 어리둥절해했다.


“나 여행 좀 다녀올게”

“이 밤에 어딜 간다는 거야?

원하는 선물 못 받아서 그래?

내가 준비한 선물은 아무것도 아닌 거야?”

“더 이상 얘기하기 싫어. 그냥 며칠 좀 나가 있을게”

“차라리 내가 세차장 사무실에서 잘게.

내가 나갈 테니, 넌 집에 있어”

결국, 에코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밤 9시에 집을 나갔다.




생일날 저녁, 나는 집에 혼자 남겨졌다.

에코가 준비한 뉴발란스 운동화에 만족했으면,

모두가 행복한 날이었겠지만

내 마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한 얘기는 안중에도 없는 그의 행태에 너무 화가 났고,

매일 내가 해주는 집밥을 먹으면서,

오늘만큼은 미역국을 끓여 주려는 마음조차 없는 것도 괘씸했다.

 

'결혼하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아이템인데,

마흔 넘어 갖고 싶어 하는 게 그렇게 사치인가?’,


‘내 돈으로도 살 수 있는 그 귀걸이를 받으려고

 일 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신세라니.’


‘남들은 연애나 결혼할 때 명품가방처럼 비싼 선물도 받는다는데, 연애&결혼 기간을 통틀어

내가 받은 첫 선물이 뉴발란스 운동화라니’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이 오지 않았다.


밤 11시 반, 카톡과 은행앱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행복해야 할 생일에 내가 기분을 망친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오늘 다이아 귀걸이를 사려했는데 어떤 걸 사야 할지 모르겠더라.

200만 원이야. 네가 갖고 싶은 걸로 사.’


다음날 저녁.

그는 세차장 사무실이 너무 춥다면서,

옷방에서 잠만 자고 나가겠다고  은근슬쩍 집으로 들어왔다.

30분 정도를 옷방에 있던 그는,

옷방도 너무 춥다며 큰방으로 건너와서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돈을 안 쓴다고 해서,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나는 그동안 나 자신한테도 5만 원 이상 돈을 써본 적이 없어.

돈을 얼른 모아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랬는데,

앞으로는 좀 쓰면서 살아야겠다고 반성 많이 했어.

어제 내가 준 돈으로 너 원하는 귀걸이 사.

진심이야”




우리는 둘 다 서툴렀다.

연애 경험이 없는 그는 기념일에 뭘 챙겨주거나 이벤트를 해본 적이 없었고,

나도 누구를 챙겨 주지도 않으면서 드라마에서 봤던 로망만 잔뜩 있었다.


하지만 이번일로 나는 몇 가지를 배웠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표현하지 못했던 것은 미련으로 남아,

때가 되면 툭 하고 튀어나오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평소에는 검소하고 실용적으로 사는 게

당연히 좋지만

언제나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을.


평상시에도 먹을 수 있는 롤케이크이나

매일 신는 운동화도 좋지만,

특별한 날에는 약간의 낭비를 해도 좋지 않을까.

물론, 나도 다이아귀걸이처럼 비싼 선물을

매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P.S.

기념일이나 이벤트에 전혀 무관심했던 에코는,

다이아몬드 사건 이후,

기념일 공포증이 생긴 것 같다.


괜찮다는데도,

결혼기념일이나 크리스마스 몇 주 전부터 

갖고 싶은 게 없는지 몇 번씩 묻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혼 1년, 결국 각방을 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