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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흙표범
Jun 14. 2024
아령 사줄까?
(feat. 이번에는 내가 집을 나갔다. 둘이서)
매몰 차게 들릴지는 몰라도,
에코와 결혼을 결심할 때
나는 세차장 일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에코가 내 사무실로 와서 내일을 도와줄 수는 없듯이,
나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코는 평일에도 주말에도 세차장을 나가기 때문에,
혼자 집에서
심심할 때마다, 이 도시에 있는
가장 친한 친구인 에코를 만나러 갔고,
이 모든 게 시작됐다.
"나 손가락이 너무 아파"
에코를 만나기 전부터 셀프세차가 취미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손세차를
많이
도와줬던 것이
문제였다.
2주에 한번 세차를 하던 불혹 넘은 내 손가락들이
하루에 2~3대 손세차를 했으니 버텨낼 리가 있나.
정형외과에서 관절염은 아니라는 소견을 듣고,
대학병원 류마티스 내과에서도 별 이상 없다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왜 이리 붓고 시리고 아픈 건지...
정말로, (손세차가) 싫어요 병이 아니고,
매일 아침 손가락이 아파서 주먹을 쥘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에코가
"근육이 부족한 것 같은데, 아령 사줄까?" 했던 날,
나는 집을 나갔다.
일요일 오후, 편지 한 장을 남겨놓고 완도로 향했다.
완도가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 먼 곳이기도 하고,
언젠가 에코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고향인 경상도는 가기 싫고,
답답하니 바다는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가는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저렴한 숙소를 예약하고,
혼자 밥을 먹고,
해가진 저녁 혼자 체크인을 하니
뭔가 예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집을 나온 일요일,
에코는 퇴근 후 식탁 위의 편지를 보고
나의 가출을 알게 되었고,
(나는 가출 내내 잠수를 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반응에도 변화가 있었다.
- 가출을 알게 된 직후(일요일) :
편지 읽었어. 내가 심각하게 생각 안 해도 되는 거지?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텐데 좋은 것 보고 잘 풀고 와!
- 가출 다음날 오후 :
이왕 바람 쐬러 갔으니 돈 걱정 하지 말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와. 100만 원 보내놨어.
- 가출 다음날 저녁 :
걱정되니 전화는 좀 받아. 어디에 있는지 좀 알려는 주라. 집에서 너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니?
- 가출 다다음날 아침 :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재발방지 대책도 마련해 놨으니까, 오늘 퇴근하고는 집에서 봤으면 좋겠다.
가출 3일째 아침. 에코의 카톡을 보기 전부터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혼자
돌아본 완도와 청산도는 정말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코와 함께 웃고 얘기하는 여행에
이미 익숙해져버렸나 보다.
다만, 집으로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르고 싶었다.
나도 가출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은 알기에 뭔가 속죄를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
대흥사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블로그에서 봤던
500년 된 느티나무가 눈에 띄었다.
두 나무의 뿌리가 연결된 연리근 나무인데,
신기한 나무인만큼 블로그에서 기도빨이 좋다는 많은 소개글이 있었다.
나 역시 나무를 찬찬히 보며 소원을 빌었다.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주세요. 아기면 더 좋구요'
정말 대흥사 느티나무의 기도빨이 있었던 걸까.
뒤늦게 알고 보니,
놀랍게도 나 혼자 가출한 게 아니었다.
서울의 난임병원을 다녀도
시험관 시술 진행단계 중 초기단계에서만 제자리걸음을 했던 내가
마흔 넘어 자연임신을
하고서는
,
두 명이서 완도까지 운전을 하고,
하루에 만 보
이상씩
을 걷고 왔다.
에코는 이제는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이런 농담을 한다.
"너 이제 가출 못 해~. 나가려면 배 속에 아이는 놔두고 나가"
하지만 나 역시 말로는 질 수 없다.
"애 낳고 나서 애랑 같이 나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제 우리 둘한테 잘해"
'초음파 중독자'
임신기간 내내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3~4주마다 경과를 보러 오라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속이 메스껍다', '태동이 안 느껴진다'는
온갖
사유를 대며
열흘이 멀다 하고 병원을 찾아가서
초음파를 보며 내 뱃속에 생명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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