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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애 Mar 15. 2023

예정된 죽음 – 슈미

디오니소스의 포도 잎사귀를 머리에 장식하고 아폴론처럼 아름답게

- 시놉시스 -
'나 스스로 빛나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슈미는 이전과는 다른 새 삶을 시작하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녹아내리는 빙하처럼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신혼을 축하하는 친구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슈미는 자신도 모르고 있던 감정에 빠져들게 되는데...


연극 <슈미>는 1890년대 헨릭 입센의 <헤다 가블러>를 오늘날 한국을 배경으로 재창작한 작품이다. 노르웨이의 모더니티 사회와 인물을 냉철하게 그려내는 입센의 사실주의 희극을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탈바꿈하며, 원작 헤다가 슈미로서 동시대에 살아가는 인간의 아름다운 삶에 대해 질문한다. 


원작의 소재와 주제를 가져왔지만, 감옥 같은 거실의 공간을 바꾸고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평등하게 설정하여 동시대를 반영했다. 주인공 슈미는 부유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지금은 경남의 아내로 화려하게 꾸민 집안에 고립되어 있다. 그녀는 스스로의 매력을 아는 인물로 현관문을 직접 열지 않고 주변 인물들에게 명령하는 권위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인다. 



‘긍정’과 ‘죽음’을 동시에 선택한 고립된 삶


자아가 강한 인간의 욕망은 충동을 불렀다. 슈미는 극중에서 끊임없이 죽음을 거론하며 죽음으로 완전해지는 아름다운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지겨운 돌림노래와도 같은 물음은 삶과 죽음 사이의 존재, 즉 인간의 존재론적 증명을 원한다. 


슈미는 증명하기 위해 ‘긍정’과 ‘죽음’을 동시에 선택했고 고립된 삶을 자처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이 그녀를 실제적 삶과 타협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슈미의 욕망이 부른 충동은 본인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촉발된다. 충동 이전, 슈미의 남편인 경만과 검사 친구인 도규와의 관계를 통해 화려해 보이지만 공허하고 무기력한 슈미를 살펴볼 수 있다. 


경만은 대출받아 무리해서 집을 사고 확정되지 않은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슈미와의 결혼으로 사회적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며, 아이를 가짐으로써 그들 사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사회체제에 가장 순응하는 그는 문제가 생기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합리화하며 책임을 무마시킨다. 경만은 슈미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요구를 흘려 보내며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적으로 수행한다. 


도규는 슈미의 아버지 밑에서 일했던, 지금은 검사인 그녀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슈미의 남편이 사회에 피동적인 순응의 방식을 보여준다면, 도규는 능동적으로 동화되어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어릴 적 선망의 대상이었던 슈미를 손에 넣기 위해 총알을 바치고 그녀가 관심 있어 할 만한 정보를 전달한다. 천천히 그녀의 주변을 차단하며 자신에게 종속시키고자 한다. 


그 둘은 슈미를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시킨다고 할 수 있으나, 사회와 타협한 이들로 인해 매사가 따분하고 심심하다고 말하는 슈미는 앞서 말했듯 고립을 자처했다. 그렇기에 ‘촌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며 상황을 관조한다. 평이한 어조로 폐부를 찌르는 듯한 말을 툭툭 내뱉지만, 그녀의 욕망에 열정은 없어 보인다. 유완이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실현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


슈미는 모든 것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그녀 스스로 긍정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동시에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자유와 책임을 동반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녀의 내재된 욕망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슈미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의 포도 잎사귀를 머리에 장식하고 아폴론처럼 아름답게” 유완은 슈미가 말하는 아름다움을 좇는다. 어릴 적 함께 피아노를 치며 들었던 슈미의 질문에 의해 삶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천재적인 정신과 학자인 유완은 애경의 도움을 받아 첫 번째 책을 집필하고 슈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두 번째 책을 준비했다. 그러나 권총을 주는 슈미의 질문과 유완의 답은 어긋났고, 불안과 광기가 흐르는 세계 속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실현될 수 없었다. 


허무한 유완의 죽음을 듣고 권총으로 자살하는 슈미를 보며 든 생각은 “드디어”였다.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선택은 불가능했다. 유완의 죽음이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않다는 외침에서 슈미의 자기비판이 기능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실패했기에 스스로를 긍정하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슈미는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을 실천하기 위해 자멸했다. 


따라서 ‘왜 죽는가’에서 ‘왜 사는가’로 재질문 되는 물음은 사실 -슈미에 한해서- ‘왜 죽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을 지니게 된다. 슈미에게 주체적인 죽음은 주체적인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며, 긍정과 고립이 공존하는 시대에서 그것이 곧 아름다움의 테제이기 때문이다. 


삶으로써 죽음을 긍정하고, 죽음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슈미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길 바란다. 



※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 | 문지애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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