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제발 좀
결혼한 여자들이 생각보다 쉽게 사지 못하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속옷일 것이다. 미혼일 때는 내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나의 세계는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한 시간은 뒤로 밀렸다. 자연스럽게 나의 속옷을 새로 사는 일도 뒤로 미뤄졌다. 항상 뒷전이 된다.
몇 년 만에 속옷 세트를 새로 샀다. 오랜 시간 결심을 굳히고 나서야. 어깨끈이 꼬이고 패드마저 뒤틀린 낡은 속옷은 이제 버려야 할 때가 왔다. 더 이상 입고 다니기에는 창피하기도 했고, 그저 나 자신에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돈을 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 자신을 위해 당당히 돈을 쓰는 것이 결혼한 여자의 삶에서는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하얗고 화사한 새 속옷을 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너무 오랜만에 나 자신에게 뭔가를 해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속옷 하나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오래오래 깨끗하게 입으려면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속옷은 섬세해서 세탁기에 넣으면 금세 손상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그 속옷을 조심스럽게 손빨래했다. 기분이 좋아지며, 속옷 한 세트를 브라와 팬티가 맞게 정리하고 옷장에 넣었다.
그렇게 작은 것 하나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른 새벽, 남편은 잠에서 깨어 물 한 잔을 마신 뒤 아침 산책을 나갔다. 나는 그의 기척에 같이 깼고, 그가 돌아오기 전에 먼저 샤워를 하기로 했다. 어제 새로 산 속옷을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 물이 잘 빠질 때까지 수건 걸이에 걸어두었다. 그렇게 작은 행동이, 마치 나만의 작은 의식 같았다. 새로 산 것, 나만을 위한 것, 조용히 나를 위해 시간을 쓴다는 것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특별하게 다가왔다.
남편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하려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욕실 문을 열고 나서,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휴…”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화장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남편이 서 있었다. 얼굴에 어떤 불만이 서려 있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남편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어릴 적 만화영화에 나왔던 파란 난쟁이, 투덜이가 생각나는 말투였다.
“난, 이런 거 싫어.”
나는 잠시 그 말을 되새겼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도대체 뭐가 싫다는 거야?”
“속옷 말이야. 제발 좀 이렇게 하지 말아줘.”
속옷. 나는 내가 걸어둔 속옷을 떠올렸다. 물이 빠지도록 수건 걸이에 걸어둔 그 속옷이 문제라는 것이다. 왜 그게 문제일까 싶었다.
“왜? 빨아서 물이 빠질 때까지 걸쳐둔 건데, 무슨 문제 있어?”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제발, 이렇게 하지 말고 옷걸이에 걸어서 말려줘.”
수건 걸이에 바로 걸지 말고, 세탁소에서 쓰는 옷걸이에 걸어서 말려 달라는 것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냥 걸어두는 거나, 옷걸이를 이용해서 걸어두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순간 말이 길어지면 싸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나는 주방으로 가서 식사 준비를 하며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렸다. “그게 뭐가 문제야. 도대체. 이상한 사람이야. 이해가 안 돼.” 속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사소한 일에 왜 예민해지는 걸까. 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부는 이해가 아닌 인정(認定)으로 살아간다.
남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습관들이 종종 보인다. 보고도 모른척 한다. 서로 30여 년을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습관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 먹고 나니 남편의 행동이 거슬리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나의 행동이 거슬린다.
결혼 생활이란 그런 것이었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 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처럼, 우리는 완전히 맞지 않는다. 그래도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해, 때로는 그냥 넘어가고, 때로는 작은 일에 눈을 감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가 이해되지 않는 만큼, 그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을까. 함께 산 시간만큼 서로를 이해하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의 하루는 그와 맞닿아 있지만, 동시에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 옆에 누워 있는 그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일상,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하나가 된 것이 아닌가.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멀어진다. 결혼 생활에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와의 작은 다름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그렇게 행동할까. 왜 그렇게 생각할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것이 각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름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남편의 행동을 그저 묵인한다. 아니, 인정하기로 했다. 그가 30여 년 동안 살아온 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나도 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내가 빨래를 하는 방식, 속옷을 말리는 습관, 물건을 정리하는 작은 디테일들.
남편은 그걸 아직 인정할 수 없는 단계인 것이다.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숫자만 50이지 여전히 어리다.
--------------
결혼이란 그런 것이었다.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서로를 인정하는 것.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인정할 수는 있다. 그와 나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맞추어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결혼이었다.
그는 여전히 속옷빨래를 보며 잔소리를 하고 있지만 먼저 어른이 된 내가 그를 ‘인정’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