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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뷰 MoBeau Jun 29. 2023

학생과 직장인 사이에서

25년을 되돌아보며 적는 소회 (1) - 유년기

  2017년 1월 설레는 마음으로 이사하기 전의 녹두의 스태미나 식당에 주섬주섬 찾아들어가던 1학년의 내가 떠오른다. 제대로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 마냥 술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만을 갖고 있던 시기였다. 나름 대학 가서 첫인상을 좋게 만들겠다며 트레이너 일을 하시는 삼촌의 도움을 받아 빡센 식단과 운동으로 15kg를 감량하고 나섰던 첫 번째 자리였던 것 같다.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동기들과 선배들을 처음 만난 그날의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벌써 만으로 6년 하고도 반이 지났다. 그렇게 술을 두려워하던 새내기는 술 없이는 못 사는 주당이 되었고, 새로운 관계에 설레하던 19살 새내기는 새로운 관계에 피곤을 느끼는 25살 애늙은이가 되었다.


  이제 내 인생의 1막이 끝나고 2막이 열리려는 시점이다. 7살부터 공부를 시작해 19살에 대학에 왔고, 20살부터 25살까지는 공부와 함께 사회에 한 발을 담그고 더 큰 세상에 몸을 던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학교라는 울타리와 학생이라는 이름의 갑옷 없이 맨몸으로 사회에 나아가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 


  그래서 나의 인생 1막을 글로나마 정리해보고 싶었다. 앞으로 점점 어렸을 적의 기억은 희미해질 테고, 추억할만한 일도 현실의 각박함에 떠밀리며 줄어들어 갈 테니까. 그리고 곧 시작될 2막도 언젠가 막을 내리고 3막의 시작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1막의 기억을 곱씹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어제자로 만 나이가 공식화되며 다시 반 오십으로 돌아왔다. 19살을 비교해서 그렇지 사실 25살이라는 나이는 정말 어린 나이다. 4년 칼졸업 후 사회로 나간 여자 동기들은 막 3년 차 직장인이 되었고, 군대를 다녀온 남자 동기들은 이제야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중이다.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임에 분명하다. 내가 좋아했던 것이 컴퓨터였던 탓에 다른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컴퓨터를 전공으로 선택했는데, 마침 컴퓨터를 전공하자마자 알파고의 등장과 함께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며 개발자의 위상이 이전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이 현역이나 공익근무요원으로 고생하는 동안 나는 회사를 다니며 경력을 쌓으면서 병역까지 해결했다.


  그저 새로 산 아이폰이 마음에 쏙 들어서 앱도 개발해보고 싶었기에 시작한 iOS 개발이었고, 아는 것도 없어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주섬주섬 준비했음에도 그동안 쌓아온 게 무의미하진 않았는지 원하는 직무로 회사에 합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시점에는 별거 없는 한물간 코인 거래소였던 회사가 입사 직후 급격한 가상자산 가격의 상승으로 갑자기 대한민국 IT기업 중 가장 핫한 회사 중 하나로 떠올랐다.


  회사가 성장하며 너무나 뛰어난 선배 개발자분들을 동료로 하여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신입들이 겪기 힘든 훌륭한 개발 환경과 좋은 멘토들과 함께 나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생각한다. 2년 반의 회사 생활 동안 개발자 페이의 전반적 상승에 더해 회사가 큰 수익을 내며 동반된 인센티브로 나이에 비해 꽤 많은 돈도 모았다.


  돌이켜보면 꽤나 잘 풀린 25년이었다. 물론 아무 역경 없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감정 소모와 스트레스도 있었다. 하지만 노력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시점에 이만큼을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 전의 장면은 새벽 응급실이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채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고, 곁엔 외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침대에서 머리를 대고 쪽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그렇게 나를 옆에서 지켜주고 계셨던 두 분을 보며 다시 잠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커서 들어보니 내가 어린 시절 중이염을 앓으며 가장 위험하게 아팠던 순간이라고 한다. 열이 40도가 넘어갔고, 첫째 아들의 이마에서 불이 나는 모습에 놀라신 어머니는 급하게 외할머니께 도움을 요청하셨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외할머니는 4살 외손자의 간호를 위해 수원에서 서울까지 올라오셨다. 다행히 별 문제는 없이 금방 호전되어 며칠만에 바로 퇴원했다. 특별할 것 없는 어린아이의 성장기 기록이지만 이 기억이 내 첫 번째 기억이기 때문인지 이를 떠올릴때마다 무언가 가족에 대한 감정이 더 각별해지는 듯싶다. 그냥 그렇다고.


  그때는 그렇게 별일 없는 듯 넘어갔지만 진짜 큰 문제는 6살이 되던 해에 생겼다. 어느 날 거실에서 공을 가지고 놀며 TV를 보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오른쪽 귀를 한 손으로 막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내 왼쪽 귀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던 나이가 아니었기에 그저 거실에서 세상이 무너져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깜짝 놀라신 어머니는 달려오셔서 나를 달랜 후 대학병원 이비인후과로 데려가셨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X-ray를 찍어봐도, CT를 찍어봐도 외부적 문제가 없다는 소견을 들었다. 그렇다면 청신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게 태생적으로 신경이 덜 형성되어서 그런 건지, 외부적 충격이 있던 건지, 아니면 어렸을 적 앓았던 중이염의 부작용일지 알 수 없다고 하더라. 그 이유를 알려면 머리 한 편을 절개하여 직접 내부를 들여다봐 확인해야만 했다. 우리 가족은 치료 가능성이 명확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런 도박은 할 수 없었고, 그때부터 나는 원인도 모른 채 한 귀만이 들린다는 사실만을 인지한 채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인생을 돌이켜본다면서 귀 안 들리는 이야기는 왜 하나 싶으실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귀 한쪽이 안 들리는 건 인생 전반에 정말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자리를 잡을 때, 나는 항상 테이블의 가장 왼쪽에 앉아야 한다. 오른편에 앉을 경우 왼쪽에 앉은 사람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아 몸을 돌려야 하는데, 이것도 한두 번이지 약속 내내 몸을 꼬고 앉아있으려면 여간 피곤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항상 가장 왼쪽에서 걸어야 한다. 이미 내 귀가 안 들리는 사실을 아는 지인들이라면 별문제 없이 자리를 내어주지만, 새로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사실을 설명하고 왼쪽 공간을 부탁하는 것도 피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잘 들리지 않는 소리는 자연스레 내 목청의 크기를 키워버렸다. 어디서 봤는데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소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크기의 소리를 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즉, 내 경우엔 일반인에 비해 소리가 절반 밖에 들어오지 않으니 스스로 이를 인식하려면 2배 크기의 소리를 내야 했던 것이다. 살면서 너 목청 참 좋다(사실 시끄럽다고 돌려 말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긴 하다만)는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 이게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내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어려서부터 발음에 신경을 많이 썼다.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더라도 발음이 명확하면 그래도 알아들을 만은 했으니까. 그래서 언젠가 깨달은 내 th 발음을 없애기 위해 해결책을 인터넷에 검색해서 펜을 입에 물고 연습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 와서 발음이 뭉개진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걸 보면 그렇게 신경 쓰며 연습했던 게 도움이 되었다 생각한다.


  귀가 한쪽 안 들리는 건 무척이나 불편하다. 주위에서 배려를 받아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고, 나 스스로도 원인조차 모르는 만큼 답답한 마음도 크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앞서 말한 발성과 발음뿐만 아니라 다른 장점도 있었다. 일단 이어폰을 한쪽만 껴도 된다. 그 말인즉슨 에어팟을 사용한다 치면 배터리가 실질적으로 2배라는 것! 


  게다가 잠들 때 주변이 시끄러워서 잠이 안 온다면 그저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그만이다. 오른쪽 귀가 막히면 소리가 안 들리니까. 산업기능요원을 수월하게 편입하기 위한 조건인 4급 요건을 귀 한쪽이 안 들리는 것으로 채웠던 것도 긍정적 요소라고 봐야겠지...?




  공교육이 시작되기 전의 기억은 귀와 관련된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우리 형제 교육에 진심이시던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어렸을 땐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프뢰벨, 몬테소리 그런 교육용 완구를 다루는 수업을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것저것 가지고 놀고, 창의력을 증진할 수 있는 여러 활동을 했던 게 꽤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 말고도 있다. 항상 시간이 나는 오후면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근처 키즈북카페로 가셨다. 어머니 본인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그 북카페에 가면 아이들이 읽을만한 책뿐만 아니라 해리포터, 삼국지, 아르센 뤼팽, 셜록 홈즈와 같은 어른들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들도 많았기 때문. 집에서 맛있는 밥 먹고 시원한 북카페 가서 만화책을 읽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읽었던 책이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처음은 다들 읽는 Why 시리즈, 보물찾기 시리즈, 내일은 실험왕, 그리스 로마신화 같은 청소년용 만화책이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읽다 보니 금세 다 읽어버리고 말았고, 그때부터는 삼국지도 읽고, 한국사 만화책도 읽고, 어머니가 읽곤 하시던 판타지 소설과 추리 소설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직도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 게 그때 생긴 책 읽는 습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덕분에 텍스트로 장면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깨달았고, 그게 내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또한 어떻게 글에서 내가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야할지 배울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세상의 다양한 지식을 책을 통해 쌓아나갈 수 있었다.

  

(2편에서 계속)



P.S. 글을 쓰며 드는 생각이 있다. 사실 이렇게 정리를 하며 글을 쓰기 전까지는 막연히 우리 부모님이 나를 위해 많은 헌신을 해주셨다는 생각 정도만 가지고 감사함을 느끼고 있던 듯하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적다 보니 물질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정말 많은 헌신과 노력, 사랑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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