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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그늬 May 01. 2021

5515번 버스를 아십니까

누군가의 시야 밖에서 펼쳐지는 다른 누군가의 삶

지하철에서 내려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이게 뭔가 싶은 긴 줄이 있다. 바로 서울대학교 정문을 지나 대학동(녹두) 방면으로 향하는 5515번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다. 도림천을 중심으로 상가가 많은 쪽 언덕에 거주하는 대학동 주민들에게 5515번 버스는 오르막길을 끙끙 올라가는 수고를 덜어주는 좋은 친구이다.



 서울대 정문 건너편에서 우회전을 하고 좀 직진하다가 상가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좁은 골목길로 좌회전을 하면 그때부터 일반적인 서울의 도심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진다. 좁고 가파른 경사를 꽤나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데, 도로의 양옆에는 인도가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은 터라 차체가 걸어가는 사람들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따로 버스 정류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약국 앞, 어느 피자집 앞 이런 식으로 알아서 정차하고 사람들은 그런 시스템에 익숙하다는 듯이 타고 내린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더 위에서 내릴수록 그만큼 그 근방에서 감정이 오묘해지는 풍경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금호타운 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려서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대부분의 식당들에는 카드 단말기가 없다. 대신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현금가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밥을 먹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사연이 많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처진 어깨로 젓가락질을 한다.


 5515번 버스 종점 근처에서는 박스 묶음, 폐가구 등이 현관 앞에 그냥 버려진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버렸다는 표현보다는 놔두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왜냐하면 그 '쓰레기'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동네 곳곳을 누비는 노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이라면 쓰레기를 함부로 내놓는 몰상식한 행동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동네에서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문화다.



 간혹 새벽에 5515번 버스를 타고 서울대입구역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정말 가끔씩 지방에서 서울로 돌아와 현재 살고 있는 자취방으로 가기 위해 서울대입구역에서 5515번 버스를 탈 때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버스 창문 밖이 아니라 버스 안에서도 생각이 복잡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서울대입구역 방면 버스는 종점에서 나름 가까운 정류장에서 타도 이미 많은 사람으로 꽉꽉 차있다. 누군가는 늦게까지 유튜브를 본다고 깨어있기도 하는 시간에 버스에 올라타지 않으면 당장 그 날의 밥벌이를 할 수 없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새벽의 공기가 항상 차가운 것처럼, 매일 마주하는 서로의 얼굴도 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반대방향의 버스를 탈 때는 모습 자체는 분명히 많이 다른데도 상당히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그 돈을 오늘 안에 다 갚냐고 울먹거리며 큰 소리로 통화를 하다가 버스 기사의 제재를 받는 사람도 있고, 사당이나 강남 아니면 선릉 등지의 유흥업소에서 일하다가 못 잔 잠을 자기 위해 해가 뜨는 것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도 있다. 도시의 번화가에서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차림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최대한 가리려는 듯 하는, 성별의 구분이 어려운 사람도 있다.


5515번 버스는 결코 배차 간격이 긴 버스가 아니다. 심지어 한 대당 승객 수는 서울 시내버스 중에서 최상위권에 속한다. 오늘 하루에도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시야 밖에 있는 정류장아닌 정류장에서 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은, 사실 그저 인식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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