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걸 알지만, 응원하는 프로야구 구단 마무리 투수의 평균자책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응 아니야. 2020년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이다. 충격적이고 절망스럽기까지 한 수치이다.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1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 한 명 당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이를 한 명 밖에 안 낳는다.”라는 문구로 인구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조성하고는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어림짐작하여 표현하기에도 모자람이 있는 수준인 셈이다.
갈수록 아이를 적게 낳는 바람에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가 기억하는 가장 과거의 시기인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합계출산율은 1점 초중반대로 내려갔다.
남녀 성비, 이민, 평균 수명 등의 요소들은 고려하지 않고 정말 단순하게만 생각한다면 여성 한 명 당 평생 아이를 두 명 낳아야 기존의 인구수가 유지된다. 따라서 합계출산율을 소수점 첫째 자리에서 반올림했을 때 2가 아니라 1이 된다는 말은, 장기적으로 국가의 존속 여부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다수의 참가자가 계속 절반으로 줄어들어서 결국 단 한 명만 남게 되는 토너먼트를 생각해보면 느낌이 확 와닿지 싶다.
토너먼트 우승자는 상금을 몰빵당하지만, 출산 경쟁(?)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세대는 노년 인구 부양을 몰빵당한다....
덕택에 뉴스에서는 물론이고 수업시간에도 심지어는 가정통신문을 통해서도 ‘저출산 고령화’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는 삶은 뭐랄까, 기부를 많이 하고 사회적 약자를 현장에서 돕고 하는 삶처럼 박수받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냅시다.”라는 말을 대놓고 해도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한민국의 존속을 논하는 중대한 자리에 '그'를 빼먹으면 섭섭하다.
보수 기독교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나의 주변 환경은 그런 분위기가 더더욱 심했다. 설교 시간이건 주일학교 공과공부 시간이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장 28절)’는 성경구절은 아무 필터링도 없이 수천 년의 시간을 뚫고 날아와 아이들 앞에 떨어졌다. 그 미사일을 정통으로 맞고 가치관을 형성하며 성장한 대표적인 아이인 나는 미래의 다자녀 꿈나무가 되었다. 기독교인이 비혼을 선택하여 ‘생육 및 번성 zero’로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이를 한 명만 낳아서 기르는 가정에도 좋지 못한 시선을 보냈던 것 같다. <생활과 윤리> 과목 발표 시간에 페미니즘 이론을 소개하는 등 나름 '깨시민'이었던 고등학교 3학년 때도 교회 친구 두 명과 함께 “우리는 나중에 합쳐서 축구팀 하나(11명)는 만들자.”라는 약속을 했던 흑역사가 있다....
저출산 고령화 현상보다는 더 '힙한'이슈들에 몇 년 간 관심을 가지다가, 전공 수업 발표를 준비하며 자료를 찾던 중 2020년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이 0.84명이라는 뉴스 영상을 보게 되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습관처럼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댓글들을 살펴보았다. 미래가 불안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당장 먹고사는 것이 벅차니 한 명 낳는 것도 힘겹다는 류의 댓글이 압도적으로 많을 줄 알았다. 이대로라면 진짜 나라가 큰일 날 테니 애를 어떻게든 많이 낳아야 한다는 댓글도 상당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시선은 여전히 너무 과거에 머물러있었다.
공감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 속에도 깊이 박혔던 댓글들은 주로 '이런 힘든 현실에 누군가를 또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어떻게 고통받으며 살지가 너무 뻔하다'는 내용이었다. 나의 삶이 힘들어서 아이를 못 낳겠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삶이 경쟁과 불안의 연속인 이 환경에 다른 어느 누군가를 또 던져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평소 시사 문제와 관련한 유튜브 댓글창을 보면 비논리와 혐오로 가득 차 있어서 화가 치솟고 내가 소속된 학과가 우리 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해야겠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차오를 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 뉴스의 댓글창에 댓글을 달고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의식이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긍정적이라고까지 느꼈다. 내가 단순히 숫자로만 여겨오던 0.84를, 많은 이들은 0.84‘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좀 뜬금없는 일화이기는 하지만, 최근에 친한 형이 나에게 본인은 비혼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조금 많이 놀랐다. 나의 지인 중에서는 누구보다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학벌도 학벌인데다가 생각도 깊고 배려심도 있으며 여성들에게 인기가 특별히 없을 외양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소위 ‘욜로’의 삶의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형이 술냄새를 풍기면서 그러나 또렷하게 뱉은 말은,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못 받고 있는 아이들이 이미 너무 많은 거 같아서 그래, 였다. 결혼을 해서 자녀까지 가지게 된다면 삶의 정말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가정에 헌신해야 하는데, 그 에너지와 시간을 우리 사회의 수많은 약자 특히 아이들에게 사용하고 싶다는 거룩한 선언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많은 고초를 겪으며 살아가게 될 '0.84'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함께 하는 삶을 살겠노라는 진심이었다.
합계출산율은 매출도 아니고, 생산량도 아니다. 새로운 인격체들이 얼마나 우리가 밟고 서있는 이 땅 위에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게 될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0.84 안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있다. 각기 다른 성격, 가치관, 겉모습이 있다. 본인이 속한 국가의 인구 그래프를 미세하게나마 위쪽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0.84에서 어떻게 늘리지?’가 아니라, ‘0.84를 어떻게 대하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