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생이 글까지 잘 쓰면 반칙
천문학자라는 존재를 처음 본 것은 TvN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였다.
각 분야의 지식인으로 구성된 출연자들 중 유난히 눈에 띄던 이가 있었는데 저자인 천문학자 심채경이었다.
NASA에나 있을 것 같은 여성 천문학자라는 포지션은 과학 문외한인 나에게 낯설었지만 저자가 풀어놓은 우주와 천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상하게 딱딱하지 않고 흥미로웠다. 당시 심채경이라는 사람은 나에게 차분히 말 잘하는 여성 과학자 정도로 기억되었다.
나처럼 '알쓸신잡' 그 사람?으로 저자를 기억하고 책을 읽기 시작해도 괜찮은 접근이라 생각한다. 우리 주위에 과학자가 어디 있나. 과학은 삶에 24시간 녹아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도서를 읽지 않고 천문학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정작 국내에 몇 없는 천문학자인 저자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책 좀 읽는다는 가정에 책꽂이 장식용으로 하나씩 구비되어 있을 만한 명작)를 완독 하지 못했다 하니 마음이 놓인다고 해야 하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근래 본 에세이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이라 지인들에게 추천을 하고,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도 했다. 새삼 놀란 것은 많은 이들이 이 책이 '과학 교양도서'라 생각해 어렵지 않을까 염려를 했다는 점이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천문학자의 세상살이에 대한 에세이에 천문학 에피소드 두 스푼인 책이다. 절대 어렵지 않다.
저자 심채경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1년 2월 22일
페이지수 271면
가격 15,000원
작가소개
천문학자. 행성과학자. 현재는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겨 달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2019년 네이처가 달 착륙 50주년을 맞아 미래의 달 과학을 이끌어갈 차세대 과학자로 지목했다.
줄거리
차례
1부 대학의 비정규직 행성과학자
2부 이과형 인간입니다
3부 아주 짧은 천문학 수업
4부 우리는 모두 태양계 사람들
1부와 2부는 천문학자가 되는 과정과 비정규직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천문학자가 되는 과정에 있어서 뉴턴에게서 영감을 받거나 과학대회를 휩쓰는 경험한 적 없다며 고백한다. 과학잡지에서 찾은 우주 관련 사진이나 지구과학 선생님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소년'적 찰나는 저자를 자연스레 천문학의 길로 인도했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비정규직 연구자로서 고용 불안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지속되는 부분에서는 더 이상 저자가 과학자라는 이유로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3부와 4부에서는 천문학에 대한 내용을 시야 넓게 다룬다. 최대한 쉬운 용어로 과학 관련 에피소드와 역사, 국내 달 탐사 이슈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어려울까 봐 움츠리지 않아도 좋다. 1,2부를 읽은 독자는 이미 천문학에 마음을 열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정도의 난이도이다.
인상 깊었던 문장
P.13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P.31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P32 과거의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토닥여주고, 쓰다듬어주고, 따뜻한 밥 한술 먹인 뒤 과감히 등 떠밀어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준다. 여러 길로 갈라진 평행우주 속 용감히 떠난 나와 용감히 남은 나, 모두를 찬양한다.
P.265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으면 저자가 자꾸만 부러워진다.
이과형 인간의 글에서 자꾸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문학 감성이 쏟아진다. 세 번을 완독 하며 마음을 흔들었던 문장들이 너무 많아 책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너덜거릴 정도였다. 이 정도면 문이과 통합형 인재다.
이 책의 별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적재적소에 놓인 유머인데 글을 쓰며 키득거렸을 저자가 자꾸만 상상된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오직 과학만 파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용의 범주이다. 자연과학 박사가 어린 왕자, 조선왕조실록, BTS, 김영하, 커트 보니것을 끌어와 과학과 살살 버무려 놓는다. 마치 독자가 잘 소화시킬 수 있도록 아는 맛과 섞어서 과학을 떠먹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넓은 시야로 누구나 공감할만한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과학 한 수저를 넣어 준다. 우리는 입을 벌려 소화만 시키면 된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으며 나에게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밤하늘에서 북두칠성도 못 찾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주가 궁금해졌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배웠다지만 흔적도 남지 않은 ‘달의 위상’이 궁금해져 검색했고 보이저 호를 주제로 한 다큐 영상을 찾아봤다. 지갑에서 만 원 지폐를 꺼내 천문학과 관련된 문양을 살펴보다가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는 주문을 외치기도 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명왕성은 태양계에서 제외되어 왜소 행성으로 분류됨)
천문학에 무관심하던 일반인이 기초과학자의 고충과 연구과정, 성과에 흥미를 갖게 되고, 엄마 과학자의 삶에 대해 공감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천문학자가 쓴 에세이는 성공 아닐까.
이 책은 다음 교양 과학서를 선택할 용기를 준다. 책 편식쟁이에게 독서범주를 넓혀주는 고마운 책이 분명하다.
장래희망란에 과학자 비슷한 것도 적어 본 적 없던 나 같은 사람이 우주가 궁금해졌다. 이 책을 교양 과학서로 독서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은 이들과 과학자의 삶이 궁금한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나와 같은 평범한 이들의 시야가 넓어지도록 앞으로도 심채경이 '글 쓰는' 천문학자였으면 한다.
*사진출처: unsplash, YTN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