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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Jan 31. 2024

Good & Bye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남편이 떠난 지 6개월 남짓, 많은 숫자들도 하나둘씩 함께 사라져 간다. 그중에서도 마치 내 것인 양 서슴없이 공유했던 숫자들이 있다.   510628-1894314

748 21-0022 936

010-5281-5283

 긴 세월 함께 사용해 왔던 고유숫자들, 저절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숫자들이다.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 같은 숫자들.


 010-5281-5283은 남편의 핸드폰 번호다. 남편의 부고를 올렸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담은 애도의 글들이 차고 넘쳤다.

 남편이 가장 즐겨 불렀던 곡이라며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 유튜브를 올린 대학 동창도 있었고 사망 소식을 모르고 생일 축하 글을 보내는 지인도 있었다. 뒤이어 공지사항을 알리는 공식 문건들이 줄을 섰다.

 열어 보는 것도 마음 아프고 쳐다만 봐도 가슴이 저렸다. 계속 충전기에 꽂아 두고 간혹 확인도 하고 애써 외면하기도 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중학교 동창 단체 카톡방에서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이 방에서 나가 달라는 어느 분의 글이 올랐기에 바로 그 방에서 빠져나왔고 하나 둘 단체 카톡방들을 닫았다.


 석 달, 넉 달, 전화기는 점점 조용해져 가고 자동이체되던 요금은 내가 챙겨 납부했다.

 12월 말, 그나마 전화는 통신사의 권한으로 완전히 해지되어 버렸다. 이 번호의 주인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남편의 카톡창에 남아 있는 마지막 메시지는 큰애가 보낸 하늘나라 편지다.     

 "아빠 잘 계시지요? 저희들도 잘 있어요."

 남편은 이 편지를 어떻게 수신하였을까?


 섬세했지만 엄격했던 아빠와 공감보다는 교조적인 훈육에 익숙했던 엄마, 가부장적인 아빠의 통제와 그것에 저항하는 엄마 사이에서 가장 많이 힘들었던 첫째 큰딸.

 마흔 줄에 접어들었던 어느 날, 나에게 강하게 부딪쳐 왔다.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노릇하느라 정말 많이 힘들었다고, 자기는 그 희생자가 되어 유리 멘털이라고.

 딸네 집 식탁에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던 때였다. 예순을 넘어선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속이 상해 울었다. 그러자 큰애가 분노하며 외쳤다. 엄마가 울면 자기가 또 져 버리는 것이라고. 나는 정말 많이 억울하고 섭섭했지만 무조건 일단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순간 감정이 격앙된 큰애가 너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몰랐다고, 엄마는 그런 줄 몰랐다고, 너무너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닫힌 방문 안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인 외손녀 둘이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 이후 딸은 종종 말했다.

 그때 엄마가 미안하다고 말해 줘서 정말 감사했고 많이 자유스러워졌다고.


 부모, 형제, 친지들로부터,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직장 생활의 동료, 상관으로부터, 칭찬만 들어온 모범생 남편도 정작 집에서는 찬사만 들을 수 있는 이상적인 아빠가 아니었다.

 엄격한 지적질, 예외 없이 이어지는 식탁 앞에서의 차가운 훈계, 정리정돈 강요ᆢ.

 모나지 않고 밝은 첫째, 녀인 큰애가 가장 큰 희생자였다. 매번 매섭게 혼나고 억울하게 벌을 섰다.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아빠의 투병 기간 동안 힘들어하는 엄마와 아빠의 중재 노력에 선봉장을 섰고 전화를 걸어 시간 이상씩 어려운 점을 토로하는 아빠의 상담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말하기만 할 뿐 듣기는 결코 할 수 없는 아빠의 고정관념 앞에서 많이 좌절했지만 끝까지 그 역할을 지켰다. 존경하고 감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힘들었던 아빠.

 투병 마지막 무렵, 몰라서 그랬다고 당신이 학교에서 가정에서 그런 훈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그런 방법밖에 몰랐다고 용서를 청한 아빠. 미흡했지만 큰애와의 인색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 남편의 임종날인 2023년 7월 11일, 화요일에도 세 아이들이 다녀갔다. 큰애는 오늘은 자고 가겠다며 잠옷 파자마를 챙겨 들고 왔다.

 밤 10시 5분, 나와 둘이서 남편과 아빠의 임종을 지켰다.

 첫째는 뭔가 다른 것일까? 20여 년 전 시골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시간, 2002년 11월 20일 새벽 3시에도 잠결에 자기를 찾아온 할아버지를 분명히 뵈었다는 말을 하였다. 남편도 나도 겪어보지 못한 체험이었다.


 나를 위로하느라 자신들의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세 아이들.

 "엄마,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엄마, 아빠는 집에서 돌아가셨잖아요."

  "엄마, 투병 기간이 더 오래 어졌더라면 엄마가 쓰러지셨을 거예요."

 얼굴 마주할 때마다

 "엄마, 필요한 것 없으세요?"

 매번 똑같은 질문으로 대화의 포문을 연다.

 가족 카톡방에 계속 아빠 사진을 올리는 첫째, 매일밤 눈물 쏟는다는 둘째, 이틀이 멀다 하고 아빠 꿈을 꾼다는 막내.  이래저래 아이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좀 더 잘 지낼 수 있었는데 ᆢ."

 '좀 더 잘 누릴 수 있었는데 ᆢ.'

 '좀 더 화목할 수 있었는데 ᆢ.'

 미안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하늘을 찌른다.


 20대 중반 풋풋했던 젊은 날, 우리 둘을 소개해 인연 맺어 주었던 남편과 나의 중매쟁이 친구 부부. 우리 모두 60대 후반에 들어선 어느 날, 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남편이 약간은 스스로도 쑥스러워하는 듯 조금은  뻐기며 점잖게 특유의 유머러스한 모습이 떠오른다.

 "나보다 우리 집사람이 나를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친구 부부는 웃음을 머금었고 나는 꿈틀 하는 자존심에 떠밀렸지만 지금은 그 말이 위로가 된다. 나와 남편을 맺어 준 그 부부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래, 내가 더 많이 사랑했다면 다행이야.' 

 '잘된 일이야.'

 '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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